일본 정부가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1965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과의 무역에서 708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흑자를 냈는데도 불구하고, 지난 1일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3대 핵심 소재와 한국의 반도체 수출규제 카드를 꺼냈다. 그 다음날 아베 일본 총리는 정당 대표 토론회에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언급하며“한국이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 우대조치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 수출규제가 사실상 경제보복 조치라는 것을 인정했다. 한국전쟁 이후 일본이 특정 국가에 대해 독자적으로 경제제재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은 ‘설마’라고 방심한 상태에서 급소를 찔린 것이다.이번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다. 지난해 10월 징용 피해자의 개별 배상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의 판결은 반세기 이상 지탱해온 한·일 관계의 근간을 뒤흔들어버렸다. 2005년 당시 총리였던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공동위원장이었고, 당시 민정 수석이었던 문 대통령은 정부 측 위원이었다. 이에 일본은 “한일협정에 근거한 국가 간 약속을 깼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과거사 문제만 나오면 가해자로 몰렸던 일본이 단숨에 피해자가 돼버렸고, 한국은 가해자의 난감한 처지로 내몰렸다. 분명히 우리가 위안부, 강제징용의 피해자인데 어느 순간 가해자로 전락한 것이다. 맑은 정신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반전이다.

      일본 열도의 분위기는 싸늘하다. 일본 정치인들은 “왜 한국은 국가 간 약속을 안 지키는가”라고 묻고 또 묻고 있다. 우리는 위안부 합의 파기를 시작으로, 욱일기 배척, 레이더 분쟁 등 적폐청산식 반일 노선을 줄기차게 펼쳤다. 일본 입장에서는 합의 사항이 계속 뒤집히는데, 다시 뭔가를 만들어도 지켜질 수 있다고 믿지 않게 됐다. 아베는 일본 역사상 최장수를 앞둔 총리이다. 그러나 최근 남북미 평화 분위기와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그의 지지세력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아베가 보수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한국 흔들기 카드를 사용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아베는 지난 5월 헌법기념일에 2020년에 신헌법을 실현할 것을 피력했다. 신헌법 제정을 위해선 종군위안부·징용근로자 등 일제강점기, 2차 세계대전과 같은 과거사와 연관된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이번 경제 보복이 전후 세대인 아베 총리의 오랜 꿈을 이루는 전초전일 수 있다. 두어 달 전 미·중 무역 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때 국제사회는 미국이 중국 IT 기업인 화웨이를 집중 공격하는 이유을 분석했다.F-35 전투기 같은 미국의 최첨단 무기 체계에 활용되는 가장 앞선 ‘5G’기술을 중국의 화웨이가 갖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안보에 엄청난 위협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미·중 패권 전쟁의 승패를 가를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오래전부터 화웨이 공격의 명분으로 국가 안보를 거론해 왔다. 이처럼 화웨이가 미·중 무역 전쟁의 상징이 된 것처럼, 일본이 한국을 향해 안보를 내세워 수출규제를 시작한 것은 예사롭게 볼 일이 아니다. 우리 반도체 산업에 치명상을 줄 수 있는 원료에 수출 제한 조치를 취하면서 대상 품목인 ‘불화수소’가 북한으로 밀반출될 가능성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이러한 아베의 행보가 트럼프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들린다. 실지로 뉴욕타임스는 지난 월요일 일본이 안보를 이유로 삼성과 같은 대형 반도체 제조사들에 대한 수출규제를 단행했다면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안보를 이유로 중국 화웨이 등을 제재하고 있는 것과 똑같다고 보도했다.  한국의 국제통화기금(IMF)는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발발 2년 전인 1995년 11월 14일 김영삼 대통령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이 화근이었다. 김 대통령은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했다. 일본은 경악했다. 그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일본통 고위관직자는 “이 발언이 IMF행을 불렀다”고 했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 때 국제통화기금행이라는 굴욕을 겪게 한 결정타는 일본의 단기외채 회수였으며, 한국을 가장 잘 지켜 주는 게 일본이라고 생각해 왔던 뉴욕·런던·홍콩의 금융시장은 큰일이 난 걸로 보고 앞다퉈 한국에서 돈을 뺐기 때문이라고 봤다. 또,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 방문 시 “일왕 사죄” 발언을 한 후 한국에 대한 일본 기업의 투자가 45억 달러에서 다음해 26억 달러로 추락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같은해 중국에서는 대규모 반일 시위가 열린 적이 있다. 이후 일본 기업들은 소리소문 없이 중국을 빠져나갔다. 일본의 유니클로가 중국에서 동남아 국가로 빠져나가는 데 2년이 채 안 걸렸다. 일본 상품 불매운동은 중국에서도 통하지 못했다. 한번 각오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나라, 그게 일본이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해 외환위기 때처럼 일본이 한국에 치명상을 입힐 가능성을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 일본은 이미 위안부 소녀상 설치를 문제 삼아 한·일 통화스와프 협상을 중단시킨 상태다. 이쯤 되면 정부가 비상등을 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일본의 조치 발표 일주일 만에 국민 앞에 선 문재인 대통령은 요지부동이다. 대통령은 아베 총리가 싸움을 걸어온 것이니, 이번 사태의 책임은 일본 측이 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 미국이 못 본 척 방치하는 상황에서 모든 것은 아베의 손에 달려 있다. 일본이 한국에 비수를 꽂을 수 있는 수단은 무궁무진하다. 여기서 일본이 경제협력의 큰 물줄기를 중국 쪽으로 완전히 돌려버리면 한국엔 재앙이 될 것이다. 한·일 관계가 좋을 때 우리 경제도 좋았다. 문제는 국내정치를 겨냥한 과잉 민족주의, 반일 정서이다. 아무리 밉고 서운해도 일본과 잘 지내야 아베를 통해 트럼프의 미국이 한국을 인정하게 할 수 있다. 최근 중국과 일본은 밀월관계를 맺었다. 중국은 이제 미국으로부터 첨단기술을 얻기 어렵다. 미국의 중국산 수입품 관세 인상으로 수출이 줄고 성장률도 둔화되고 있다. 일본과 친해져야 할 이유가 넘친다.  그래서인지 난징대학살 추도식에서도 일본을 겨냥한 과격한 발언이 사라졌다. 미래를 위해 과거의 치욕에 입을 다문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반도체, 디스플레이 제조를 위해 일본에서 각종 부품을 수입하는 액수는 상당하다. 한국은 이번 규제로 인해 일본 또한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은 감수하겠다는 의미가 짙다. 대법원 판결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언제 어디서든 또 다른 트럼프나 아베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원천기술을 축적하고 소재·부품 국산화율을 높여 대외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이참에 인공지능·사물인터넷 등의 IT 기술도 특정 기업이나 나라에 종속되지 않도록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대외적으로는 일본인 납북자 문제로 고심하는 아베 총리를 파고들 카드도 꺼낼 만하다. 북한이 우리 의도대로 움직여줄지는 미지수지만, 아베를 움직이기 위해 북한을 지렛대로 사용할 수도 있겠다. 동시에 한국은 WTO에 일본을 제소하고, 한국은 글로벌 제품을 공급하는 중요한 제조업 국가이며, 일본의 보복은 미국, 중국, EU 전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함께 일본을 견제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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