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를 통틀어 보수파를 혼내준 통치자로 19대 주상인 숙종이 꼽힌다. 대부분의 왕들은 보수파의 눈치를 살피기 급급했다.
숙종은 임진왜란 62년 뒤인 1661년에 태어나서 1674년에 왕이 됐다. 우리 나이로 14세에 왕이 됐으니, 요즘 같으면 중학교 1학년 나이에 권좌에 오른 셈이다.
서인당의 총재이자 기득권층의 구심점, 보수파의 상징인 송시열을 처리했을 때, 숙종은 14세였고 송시열은 68세였다.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은, 50년간 서인당이 잡고 있던 정권이 남인당으로 넘어가는 와중에 갑자기 사망했다. 서인당과 남인당의 성향을 굳이 구분하자면, 서인당은 '더 보수파'이고 남인당은 '덜 보수파'였다. 그래서 그는 살얼음 같은 위험한 상황에서 왕이 됐다.
현종이 죽은 지 사흘 뒤인 동시에, 숙종이 왕이 되기 2일 전이었다. 일반적으로, 왕이 죽으면 5일간은 왕위를 비워뒀다. 이때 숙종은 세자 신분이었다.
세자 신분의 숙종은 국민화합을 위해 송시열에게 차기 정부의 원상(院相) 자리를 제안했다. 원상은 어린 왕을 보좌하는 재상급 벼슬이다. 정권이 서인당에서 남인당으로 이행되는 혼란기였으므로, 안정적인 정권교체를 위해 서인당 총재인 송시열의 환심을 사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송시열은 숙종의 요청을 단칼에 거부했다. 권력이 남인당으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도록, 이번 기회에 '애송이 임금'을 길들이자는 의도였다.

   숙종은 즉위식 다음 날에도 송시열에게 사람을 보냈다. 송시열은 그럴 줄 알고 미리 한양을 떠나 버렸다. 어린 임금의 애를 좀 더 태울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숙종은 이번에는 현종의 지문(誌文)이라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지문은 죽은 이의 신상 정보와 무덤의 위치 등을 담는 글이다.
송시열은 이것마저 거부했다. 어린 왕이 항복할 때까지 버티기로 작정한 것이다. 왕이 글 하나만 써달라고 부탁하는데도 이를 거부했으니, 송시열의 행동은 왕을 모독하는 처사였다. 이쯤 되면 웬만한 왕들은 송시열의 희망사항을 들어줬을 것이다. 적어도 친(親)보수로 선회하는 시늉이라도 해서, 송시열의 비위를 맞춰줬을 것이다. 그러나 숙종은 오히려 송시열을 정1품에서 종1품으로 한 단계 강등시켜 버렸다.
뒤이어 보수파 선비들이 상소 등을 통해 송시열을 옹호하자, 숙종은 그들을 귀양 보내거나 꾸짖는 방법으로 억눌렀다.

   강공을 이어가던 숙종은 즉위 4개월 보름 뒤인 숙종 1년 1월 13일(양력 1675년 2월 7일)에 전보다 훨씬 더 경천동지할 만한 조치를 내놨다. 송시열을 귀양 보낸 것이다. 송시열 인생에서 이것은 최초의 귀양이었다. 보수파의 지지를 배경으로 오랫동안 왕들을 압박해온 송시열이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망신을 당한 것이다. 숙종을 어리다고 얕본 송시열로서는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참담했을 것이다.
이로부터 15년 뒤, 송시열은 또 한 번 숙종에 맞섰다. 숙종이 장옥정(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것을 극력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자 숙종은 이번에는 가차 없이 사약을 내렸다. 보수파들이 하늘로 떠받드는 송시열의 입 안에 사약을 쏟아 부은 것이다. 기득권층이 존경하는 보수파 총재를 이렇게 함부로 다룬 왕은 찾기 힘들 것이다.  숙종이 그런 군주가 된 것은 그 개인의 역량뿐만 아니라 국내외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숙종처럼 보수파의 기를 단단히 꺾은 왕은 희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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