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미국이 아무리 평등한 사회라고 하지만 사람의 등급은 항상 존재하고 있다. 요즈음 대학들이 합격 통지서들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일찌감치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학생들이나 부모들은 기쁨과 즐거움의 나날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원하는 대학에서 여전히 합격 통지서가 오지 않아서 좌불안석인 가정들도 있다. 이제 한 두 달 후면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시즌이 다가온다.

   진학하는 학교, 취직한 회사나 연봉에 따라 졸업생들은 일등급으로 혹은 꼴찌로 등급이 매겨진다. 그 부모들 역시 자식농사의 성적표를 받아 든 기분을 맛보게 될 것이다. 자식 농사의 일등급 성적표를 받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하고 잔뜩 풀이 죽기도 한다. 그래도 이곳 콜로라도는 그 분위기가 훨씬 차분한 편이다. 하지만 켈리포니아나 한인들이 많이 사는 대도시에서는 아주 심각할 정도로 분위기가 차갑다.
일등이 평생 일등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카피 샵 체인인 킹코스의 창업자 폴 오르팔라는 꼴찌 중의 꼴찌였다. 글을 읽을 수조차도 없었다. 학습장애까지 있던 그는 초등학교 때 낙제를 거듭했다. 대학가기가 지금보다 훨씬 쉬웠던 1960년대 말 그는 어찌어찌해서 켈리포니아의 사립대학인 USC에 들어갔다. 하지는 학업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 옆에서 커피 타주고 피자를 주문하기도 하면서 시중을 들어주었다. 그러다가 페이퍼가 완성되면 카피 샵으로 달려가서 복사를 해서 제출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그러나 카피 샵이 너무 붐벼서 제때 복사를 할 수 없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바로 그 안타까움에서 착안해서 시작한 것이 지금의 킹코스이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성적이 바닥인 그는 회사에 취직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22살 때인 1970년 아버지의 보증으로 5천 불을 대출했다. UC 샌타바바라 근처에 복사기 한 대를 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제록스 복사기 월 대여비는 1,000달러였고, 복사 비용은 장당 4센트였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버지는 “데스벨리에서 모피 장사를 하는 게 낫겠다”며 기막혀했다.
하지만 1센트, 2센트 계산을 해가며 시작한 장사가 2004년 페덱스가 매입할 당시 연 매출 20억 달러를 올리는 대기업으로 성장을 했다. 전국에 1,200개의 매장을 가진 명실상부한 회사가 된 것이다. 기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자기 회사의 어떤 기계도 작동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러기에 그의 사업 모토는 간단했다. 자신이 회사에서 얼쩡거리면 될 일도 안 된다며 직원들에게 다 맡기고 자신은 사라져 주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사장이 직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대우를 잘해주니 회사는 저절로 굴러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던 때를 떠올려보자. 그 시절 한참 앞서가는 것 같아 부러웠던 친구들도 있었다. 반대로 한참을 뒤처져 보이는 친구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뒤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는 지 모른다. 한 때는 잘 나가던 친구들이 갑자기 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경우도 있다. 느릿느릿 한참은 뒤처졌던 친구들 같았는데 마침내 그 분야의 권위자가 되어 잘 나가는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것도 처음부터 정해진 것은 없다. 꼴찌라고 평생 꼴찌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가 봐도 꼴찌 인생을 사는 사람의 것이었다. 아무런 죄를 지은 것이 없는 데도 항거조차 하지 않았다. 빌라도도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몇 번이나 석방시키려고 했다. 자기 편이 되어주는 빌라도에게라도 달려들어서 죄가 없음을 밝혀야만 되는 것 아닌가? 대제사장 종의 떨어진 귀를 붙여주실 수 있는 분이다. 열두 군단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을 불러다가 대제사장의 하수인들과 로마 군인들을 제압하실 수 있는 분이다. 하지만 주님은 아무런 힘도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털 깍는 자 앞에 서 있는 순한 양처럼 그 몸을 맡기셨다. 가지고 있는 힘은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의 간계와 모함을 너무나 잘 아시면서도 그 잘못을 들추어내시려고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안 죽어도 되는 무모한 죽음이었다. 싸워보기도 전에 지면 패배자요 꼴찌 인생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부활을 모를 때의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3일 후 부활의 대 승리를 알고 있었다.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말하는 죽음마저도 그 발 앞에 굴복시키는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절망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망과 영원한 기쁨을 주는 승리가 바로 부활이다. 우리에게 부활이 있는 한 꼴찌는 절대 영원한 꼴찌일 수 없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한 없이 울었던 여인들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다. 의심이 변하여 확신이 되는 것이 부활이다. 도마는 의심이 많았던 제자이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그에게서 의심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오히려 가장 확신 있는 제자로 제자들 중 가장 먼 지역인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로써 생을 마감하게 된다.
두려움이 변하여 평안이 되는 것이 부활이다. 제자들이 얼마나 두려워서 떨었는지 모른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는 두려워서 문을 꽁꽁 잠그고 있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베드로는 어린 소녀 앞에서도 벌벌 떨 정도였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주님의 부활은 꼴찌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을 주시는 축복 중의 축복이다. 이 부활의 은총과 축복이 때론 실망하고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에 놀라운 가능성이 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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