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이다. 지난 2008년 금융위기가 시작된 곳도 바로 뉴욕이다. 뉴욕이 휘청거리니까 전 세계가 뿌리까지 흔들렸던 것이다. 금융만이 아니다. 음악, 미술, 건축, 패션, 음식 등 거의 모든 사회 문화 분야에서 선두적 위치에 있는 곳이 바로 뉴욕이다. 그럼에도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범죄에 대한 불안으로 떨며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1970-80년대 이야기이다. 거의 모든 도로 표지판들과 벽들은 낙서로 도배질이 되어 있었다. 길거리에는 쓰레기로 가득 차서 악취 때문에 숨을 쉬기 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불량배들은 뉴욕 거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인과 강도를 일삼았다. 시민들은 밤이면 문을 겹겹이 잠그고 집안에 들어박혀 숨을 죽이고 지내야만 했다. 범죄율은 나날이 올라가고 시는 재정적으로 파산상태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나아질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이 체념과 절망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던 1982년 어느 날 ‘애틀랜틱’이란 잡지에 ‘깨진 유리창: 경찰과 동네의 안전’이라는 작은 글이 실렸다.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라는 학자가 기고한 것이다. 제임스 윌슨은 우리가 사는 덴버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시카고 대학을 나온 그는 하버드와 UCLA에서 정치학을 강의했다. 그는 ‘깨진 유리창’ 이론으로 미국인의 삶의 질 향상에 지대한 공헌을 한 후 지난 2012년 3월 80세를 일기로 사망을 했다. 뛰어난 학자이며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패트릭 모이니헌은 그를 가리켜 “미국에서 가장 스마트한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때 기고한 글의 내용은 짧고 단순한 것이었다. 범죄를 막기 위해서는 살인과 강도 등 개별 사건을 해결하는데 힘쓰는 것보다 범죄가 용인되는 환경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찰은 강도, 살인 등 강력사건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작은 범죄 단속에 더 신경을 쓸 것을 주문했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면 불량배들은 유리창 정도 깨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닌 것으로 알고 주변에 있는 모든 유리창들을 깨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유리창이 깨진 지역은 낙서가 난무하기 시작한다. 쓰레기를 마구 갖다 버린다. 결국 머지않아 마약과 매춘이 난무하는 우범지대로 변모하게 된다. 이 글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다. 그 중 한 사람이 훗날 뉴욕 시장이 된 루디 줄리아니이다. 1994년 뉴욕 시장에 취임한 그는 이 ‘깨진 유리창’ 이론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이 이론에 절대적으로 공감을 하는 윌리엄 브래튼을 뉴욕 경찰서장에 임명했다. 두 사람은 거의 모든 시와 경찰의 힘을 작은 범죄를 단속하는데 쏟아 부었다. 돈을 안 내고 지하철을 타는 무임승차부터 막았다. 전에는 경찰이 그런 단속까지 하기에는 인력도 재정도 허락하지 않았다. 경찰 스스로가 기피하던 일이다. 그런 사람들을 단속해봤자 일거리만 늘어나지 아무런 성과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작은 단속이 뉴욕을 살린다는 사명감을 일선 경찰에게 강조를 했다. 낙서, 노상 방뇨 등 사소한 범죄를 막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새로운 정책을 시행한 지 불과 한 두 달 후부터 작은 범죄 위반이 줄면서 살인 강도 등 강력 범죄 사건이 눈에 띄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쓰레기와 낙서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도시는 매일 깨끗한 모습으로 바뀌어져 갔다.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강도 사건이 터졌던 센트럴 팍도 다시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면서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이 늘어났다. 타임스 스퀘어 등 시내 곳곳이 재개발되면서 뉴욕시 전체가 활기를 되찾았다. ‘뉴욕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온 것도 바로 그때였다. 뉴욕의 성공사례를 본 다른 대도시들은 너도 나도 ‘커뮤니티 폴리싱’이라 불리는 뉴욕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1992년 4.29 폭동 이후 높은 범죄율로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LA 시는 뉴욕의 경찰 서장이던 윌리엄 브래튼을 아예 모셔 왔다. 그 후 LA 역시 급속한 범죄 감소를 경험했다. 브래튼 재임 시절 뉴욕 살인율은 50%가 감소했고, LA 역시 50%가 줄었다. 범죄율 감소가 전적으로 ‘깨진 유리창’ 방식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이 범죄 감소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작은 죄가 얼마나 큰 죄가 될 수 있는 지를 우리는 다윗에게서 너무나 생생하게 보고 있다. 다윗은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분명한 삶의 원칙을 갖고 있었다. 모든 일을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결정했다. 분위기 따라 행동이 달라지지 않았다. 기분 따라 감정의 기복이 결정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먼저 물었고, 응답을 받은 후에 움직였다. 하지만 이 원칙을 깨는 일이 생겼다.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밧세바를 보았고, 그를 왕궁으로 오게 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게 생각했다. 하나님께 물어 볼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작은 일이 어떻게 살인까지로 커지는 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작정한 충신 우리아를 얼마나 간교하게 속였는지 모른다. 결국 그를 죽이게 한다. 다윗은 절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자 결국 그의 인생의 모든 유리창이 깨지고 만 것이다. 유리창만 깨진 것이 아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온갖 쓰레기들과 낙서들도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다. 온갖 속임과 부정, 살인은 바로 거기서 나왔다.
우리 삶에 ‘깨진 유리창’ 하나가 없는 지를 늘 살펴보아야 한다. 바쁘다고, 귀찮다고 그냥 방치해 두면 안 된다. 나중에 하겠다고 미루어서도 안 된다. 깨진 유리창이 있다면 즉각 보수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유리창들도 보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작은 죄가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남들도 다 하는데 뭐!’ 라는 생각이 가장 위험한 것을 알아야 한다. 작은 거짓말을 감추다 보면 조금 더 큰 거짓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거짓이 거짓을 불러오는 것이다. 처음부터 큰 유리창이 깨지는 것이 아니다. 겁도 나고 치러야 할 값이 크기 때문에 잘 깨지 못한다. 하지만 작은 유리창을 고치지 않으면 결국 큰 유리창도 깨지게 될 것이다.
- 기자명 weeklyfocus
- 입력 2013.02.14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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