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신중하게 대처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아이들 싸움’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어린 아이들에겐 ‘나’와 ‘적’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부모가 신중하게 좌우전후를 살피지 않고 아이 말만 듣고, 감정만 가지고 덤볐다간 어른들 간의 사이도 서먹해진다.
이분법적 사고는 그 범위에 있어서 서로 배척되는 두 개의 구분 밖에 없다. 흑과 백,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 우리편 아니면 적으로 구분된다. 조지부시가 9.11 직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세계를 선과 악, 미국편과 적으로 나눈 것은 유명하다. 그 때 부시의 사고구조를 분석하며 ‘선악의 이분법적 세계관’이란 말이 자주 쓰였다.
 늘 그렇듯이 이번 선거에도 ‘색깔론’이 등장했다. 누가 좌파냐, 누가 빨갱이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좌파’나 ‘빨갱이’는 반대세력을 일컬을 때 사용된다. 6.25 전쟁이후 우리는 수많은 반공교육을 받아왔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에는 건물이 서너동 있었는데 건물마다 빨갛고 큰 글자로 ‘멸공’ 등의 글자가 써 있었다. 삐라를 주워오면 학용품으로 바꿔주기도 했다. 해마다 6월이면 각종 표어와 포스터를 전교생이 그려서 운동장 한가득 붙여놓곤 했다. 여름이면 운동장에 큰 천막을 치고 동네사람 다 불러모아 ‘이승복’ 영화를 보여주곤 했다. 현재의 20대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30대 이상의 사람들에겐 ‘빨갱이’ 내지는 ‘좌파’의 존재가 각인되어 있다.

 유신정권에 맞서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보며 어른들은 ‘빨갱이’라 했다. 전교조의 등장을 보면서도 같은 말을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내가 다녔던 학교법인 안에서도 대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이 ‘빨갱이’라 손가락질 했던 대학생들은 유신정권에 맞서, 이 나라가 민주주의로 한 걸음 내딛는데 공헌했다. 우리 학교 앞에서 시위를 했던 언니 오빠들은 ‘독립군을 잡으러 다녔던’ 친일파 군인 출신 이사장을 몰아내고 학교법인을 시에 귀속시켜 교육환경과 교육의 질을 개선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분법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분법은 사람을 보는 시각을 너무나 편협하게 만들어 버린다. 상대를 ‘적’이라 규정짓는 순간, 그를 보는 모든 관점은 달라지며 그의 말을 들어줄 마음조차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2009년, 회사측에서 아무런 이유를 듣지 못한채 해고당한 2,646명의 노동자들이 ‘이유를 알려달라’며 집회를 하자 이들을 ‘빨갱이’라고 했다. 경찰은 자국민에게 국제법상 엄격하게 금지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테이저 건’을 사용해 그들을 진압했다.

 분단의 나라, 아직도 북과 경계를 나누어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6.25라는 끔찍한 전쟁을 겪은 세대들의 우려도 알겠다. 그러나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무조건 적으로 단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그저 ‘나’와 ‘적’뿐인, 싸움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린아이의 논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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