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년 전 한 고등학교에서 운동화 한 켤레를 훔쳤던 일을 평생 마음 속에 짐으로 안고 살던 60대 노인이 학교를 찾아가 5백만 원을 기부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오전 수업 시작종이 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강원도 강릉시 강릉여자고등학교 교장실에는 남루한 등산복 차림의 60대 남성이 들어섰다. 노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학교 교장에게 “부끄러운 과거를 털어놓으려고 왔다”며 참회하는 표정으로 두툼한 흰색 편지 봉투 하나를 탁자에 꺼내 놓았다. 봉투 속에는 은행에서 바로 찾은 듯한 5만원권 지폐 100장이 들어 있었다. 노인은 “1960년대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신문 배달을 하다 강릉여고 복도에 예쁜 운동화가 있어서 한 켤레를 훔쳤다.”고 고백했다. 노인은 “그때 일이 50년 동안 평생 짐이 됐고 죄의식으로 가슴이 무거웠다. 이제는 털어버리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기 위해 학교를 찾았다. 오늘부터는 가벼워질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려운 학생에게 사용해 달라고 5백만원을  전했다.

  필자가 이 곳에서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불편하게 들어야 했던 말 중 하나가 “쟤, 옛날에 좀 그랬어!”라는 말이다.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거들먹거리는 태도와 업신여기는 마음이 합해져서 나오는 말투를 듣고 있자면 속이 뒤집힐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필자가 알고 지내는 한 지인은 20여년 전 한국 유명 대학교에 당당히 입학한 수재였지만 먹고 살기 힘들어 학업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없는 사람들에게는 따뜻하게 대했고, 자식들에게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어른들을 모시라고 올곧게 가르쳤지만, 정작 그를 바라보는 잣대는 세탁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김씨에 불과했다. 가진 돈과 신분으로 사람을 평가했던 그 시절, 그는 참 많은 수모를 겪었다고 했다. 세탁소를 그만두고 청소를 시작했다. 밤 잠 안 자고,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모은 돈으로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도 어엿한 사장이 되었다. 이젠 김‘사장’이 된 지도 오래되었고, 이웃을 돌볼 줄 아는 구세군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김‘씨’로 하대를 하곤 한다. 그의 삶 속에 박혀있는 인고와 눈물의 세월을 인정해 줄만도 한데, 그것이 잘 안되나 보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심보가 발동한 것일까. 곧 죽어도 자기 밑에서 일했던 놈이라고 얕잡아 본다. 20여 년 전 3개월 정도 함께 일한 것을 가지고 마치 30년 동안 월급을 준 것처럼 말이다.

   도박으로 전 재산인 집을 홀랑 날린 또 다른 김씨. 줄담배를 피우며 소주병을 끼고 살았던 그 사람은 가족에게는 기생충과 같았다. 아내가 식당에서 벌어오는 돈은 도박판 밑천이었고, 아이들은 돈 잃고 들어온 날 두들겨 패는 화풀이 대상이었다. 결국 한국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던 아내와 아이들은 친척이 있는 미국행을 선택했다. 몇 년 후 김씨도 가족을 찾기 위해 덴버에 왔다. 다시 만난 가족들은 공포와 불안에 휩싸였지만,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나서는 남편의 모습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종교도 가지고, 지난 10여 년 동안 아주 착실한 남편과 아버지로서 살았다. 그런데 얼마전 한 식당에서 그에 대해 오가는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듣게 됐다. 가게 계산대에서 10불이 없어진 것을 김씨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자기 버릇 남 못 준다”는 얘기가 계속 오가는 동안 김씨는 어느새 소도둑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행방이 모호한 10불 때문에 마음잡고 살고 있는 김씨의 인생을 마구 흔들어놓고 있었다.

 참으로 어렵지만 사람은 변할 수 있다. 그러니 옛날의 모습만 기억해 단정짓지 말자. 최근 한국에서 63빌딩보다 높은 건물의 뼈대를 세우면서 중견기업 파워리더로 화제가 된 인물이 있다. 현 박주봉 대주 KC그룹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20년전 무연탄 하역과 트럭운전을 했던 청년이었다. 가난하지만 부지런했던 그는 정주영 회장의 눈에 띄면서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계기만 주어진다면 사람은 충분히 변할 수 있다. 범죄자가 인정 많은 경찰을 만나 바뀔 수도 있고, 마약중독자도 가족의 사랑으로 마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계기가 있으면 누구든지 변한다. 우리는 이 변화를 인정해주어야 한다. 60세가 되어서야 마음의 짐을 벗게 된 할아버지, 단순하게 생각하면 가난한 소년 시절에 저지른 도둑질인데 그 죄책감은 평생 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되려 학생을 돕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하는 것은 금물이다. 예전의 코찔찔이였던 그가 대통령이 되어 이 나라를 이끌어나갈 수도 있고, 과학자가 되어 인류에 공헌을 할 수도 있으며, 선생님이 되어 그런 인재를 키울 수도 있지 않은가.

 바야흐로 남 말하기 좋아하는 연말연시가 돌아왔다. 요즘 주변은 송년회 일정을 잡느라 바쁘다. 송년회의 원래 목적은 뒷담화를 안주삼아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것이 아니다. 한 해를 정리하면서 가까운 사람들과의 우정을 돈독히 하고, 고마운 사람들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한 것이다.  이번 송년회의 원칙은 남의 말을 하는 자리가 아니라, 스스로를 반성하고 계획을 세우는 자리로 정해보자. 남을 칭찬하며 함께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보자. 내가 내뱉는 말이 곧 내 마음의 거울임을 명심하면서 말이다.  <편집국장 김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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