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린다는 결근이다. 아이가 학교를 안 가겠다고 떼를 써서 달래고 달래다가 결국 결근을 한단다. 모두들 “그래!” 하는 표정이다. 린다의 딸은 다운증후군을 갖고 있다. 다운증후군은 잘 알려져 있듯이 염색체 이상으로 인한 선천적 질환이다. 그 원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산모가 여러 번 아이를 낳았을 경우나 나이가 많을 경우 다운증후군 아이를 낳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설이 있다.
린다는 내가 처음 케이스 매니저가 되었을 때 실무를 가르쳐준 사람이다. 린다는 내게 케이스 매니저의 새로운 업무와 관계 형성뿐만 아니라 병동에서의 위치와 환자를 대하는 태도 등등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때 이미 린다는 케이스 매니저 경력이 15년 이상 된 베테랑이었다.
린다는 전남편인 하와이안 일본인과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두었다.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녀는 전남편과 헤어진 후 두 번째 결혼에서 딸을 얻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다운증후군을 앓게 된 것이다. 임신 당시 마흔이었던 그녀는 태아가 다운증후군 같다는 소견을 듣고 양수검사까지 했다. 결과는 역시 다운증후군! 아기는 심장에도 이상이 있어 보였다. 아이를 지울까 고민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라고 린다는 말했다. 하지만 존엄한 생명을 자신의 뜻대로 없앨 수는 없어서 낳기로 했단다. 그 과정에서 두 번째 남편과 심한 갈등이 있었고, 결국 남편은 아이를 낳기도 전에 떠나버렸다. 그때 린다의 어머니는 린다의 집으로 들어와서 풀타임으로 할머니가 되어주기로 했다. 그녀는 딸의 결정에 어떤 사족도 붙이지 않고 무조건 따라주기로 했던 것이다.
아빠 없이 아이를 낳던 날 사춘기의 두 아들이 병원 복도를 서성거리며 엄마의 순산을 기도했다. 다행히 린다는 자연 분만을 했지만 아기는 할머니의 품에 안기기도 전에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틀 후 아기는 심장판막의 구멍을 막는 대수술을 받았다. 아기는 다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서 각종 의료기구들을 꽂은 채 사투를 벌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기는 한 달 후 집으로 퇴원 할 수 있다.
이후 린다는 아이의 아빠가 되고 외할머니는 엄마가 되어 지극 정성으로 아이를 키웠다. 그러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이의 건강 문제로 린다는 수시로 결근을 해야 했다. 이제는 우리도 이골이 나서 린다가 결근하면 ‘또 아이 문제?’라고만 생각한다. 그래도 케이스 매니저들의 수장인 디렉터를 포함해서 누구 하나 불만이 없다. 린다는 일을 하는 동안만큼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아침 회진을 도는데 마흔 두 살의 여자 환자가 눈에 띄었다. 병명은 ‘폐렴’으로 인공호흡기는 달지 않았지만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힘겹게 들렸다.
“인공호흡기를 걸어야 할 것 같지 않나요?”
“무슨 일이 있어도 심페소생술을 하지 않겠대. 인공호흡기도 달지 않을 거야.”
함께 회진을 돌던 중환자실 의사가 말했다.
“보면 알겠지만 환자는 다운증후군이야. 오래 살았지. 다운증후군이면 보통 마흔 전에 죽어. 부모들이 얼마나 잘 돌보았는지 심한 폐렴 말고는 별 문제가 없어. 지난가을에 폐렴 예방 주사도 맞았다던데.”
환자의 얼굴은 주름투성이에 다운증후군 환자 특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몸은 열 살짜리 아이처럼 왜소했다. 불편한 데는 없냐고 물어보면 뭔가 대답은 했는데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환자의 정신 연령은 일곱 살 정도라고 적혀 있었다.
회진을 도는 동안 환자 가족들은 모두 병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회진이 끝나자 환자의 부모가 들어왔다. 언뜻 보기에도 팔순이 훨씬 넘어 보이는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였다. 나는 “두 분이 환자를 간호하기는 힘들지 않나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아직까지는 할 만하단다. 환자는 주에서 선정하는 의료 혜택의 수혜자로 지정되어 방문 간호사도 집에 오고, 또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도 가끔 온다고 했다. 목욕을 시키거나 밥을 먹이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환자를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기는 등 힘을 쓰는 일은 아버지가 한다. 의사를 만나러 갈 때 운전을 하는 것도 아버지의 몫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가 낮에는 집단치료 같은 것을 받으러 다녔단다. 아이가 집에 없는 시간에 노부부는 청소나 빨래 같은 집안일을 할 수가 있었는데 지난 몇 년간은 아이가 거의 집 안에서만 지내는 바람에 종일 아이에게 매달려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부모는 점점 늙어 가는데 아이를 돌보는 데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이 들었다. 대화는 잘 안 되고 엄마만 아이의 말을 알아듣는 정도다. 그러면서 노부부는 케이스 매니저 린다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잘 아는 사이이냐고 묻자 지난 10여 년간 다운증후군 아이를 지원하는 단체에서 만났던 사이란다. 전화를 걸자 린다가 득달같이 내려왔다.
린다와 마주앉은 노부부가 “이젠 그만 놓아주어야 할 것 같아”라고 말하자 린다도 고개를 끄덕인다.
“저렇게 힘들어 하는데 더 이상 붙잡고 있으면 우리 욕심 같아서 말이지.”
아이는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산소 마스크 위로 미간이 넓은 두 눈을 끔벅거리며 창밖만 바라보았다.
“참 잘 견디셨어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잖아요. 평생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일주일 내내 하루 24시간씩 벌써 40년이잖아요.”
“그래. 하루의 휴식도 없었지. 그렇지만 저 아이를 통해 사는 법을 배웠지요. 우리가 아니면 누가 이 힘든 과정을 이해하겠어. 욕심으로 말하자면 누구라고 아이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겠어.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계라는 것이 있습디다. 욕심을 내려놓고 아이를 돌보는 데만 최선을 다했어. 우리가 좀더 부자였다면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일 년 365일을 함께할 수는 없었겠지."
린다가 안경을 벗으면서 눈물을 훔쳤다. 나는 린다의 눈 화장이 까맣게 번지는 것을 보고 물 티슈를 찾는다는 핑계로 방을 나왔다. 나까지 함께 훌쩍이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물 티슈와 얼음물 세 잔을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노부부와 린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간간히 눈물도 흘리고 웃음도 터뜨렸다. 나는 그들에게 물 티슈를 건네주고 얼음물을 한 잔씩 돌리면서 날씨가 너무 좋지 않느냐고, 어제는 눈이 펑펑 왔는데 오늘은 화창한 봄날 같다고 화제를 바꿨다.
그러자 린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퇴근하면 바로 지원 단체 멤버들에게 아이가 입원해 있다는 것을 알릴게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전화하세요.”
천천히 중환자실을 걸어 나가는 린다의 뒷모습이 참 쓸쓸해 보였다. 그녀가 오늘 자신과 딸의 미래를 보았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오후가 되어 환자는 일반 병동으로 옮겨갔다. 상태가 좋아져서가 아니었다. 환자의 상태가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고 호흡 곤란이 온다고 해도 인공호흡기를 달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환자실 간호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가 있던 병실에 새로운 환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내 하루도 다시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어둠이 내린 지 한참은 된 것 같다. 어제 내린 눈으로 얼룩져 있던 차창을 운전대를 잡은 채 분무기를 작동시켜서 닦는다. 와이퍼를 움직인다. 깨끗이 닦인 창으로 길게 이어진 가로등 불빛이 들어온다. 길게 이어진 빛이 마음으로 들어온다. 팍팍한 인생살이 중에 작은 빛이라도 되어 누구의 가슴으로 스며들 수 있다면…….
다음 날 출근 길에 린다의 방을 찾았다. 컴퓨터 화면에 가득 뜬 린다의 딸 사진. 지난 크리스마스 때 붉은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왕관까지 쓰고 찍은 사진이다. 아이는 활짝 웃고 있었다. 린다가 화면을 가리키며 말한다.
“내 소원은 이 아이보다 하루 늦게 죽는 거야.”
하루 종일 가슴이 먹먹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