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쪽의 몽골초원에는 강력한 유목국가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중국 땅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거나 아니면 저 멀리 서쪽으로 이동함으로써 사라지고 말았다.그런데 단 하나 예외가 있다. 칭기즈칸의 후예인 몽골족이 바로 그들이다. 몽골은 13세기 초반에 채택한 국호를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몽골제국의 본거지인 몽골초원의 상당부분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강인한 생명력을 보이는 비결은 무엇일까? 지금의 몽골공화국과 내몽골자치구(중국령)는 넓은 의미의 몽골을 구성한다. 이 몽골의 삼면은 산림지대로 둘러싸여 있다. 몽골의 서쪽에는 알타이 산맥, 동쪽에는 흥안령(싱안링) 산맥, 북쪽에는 바이칼 호수 밑의 산림지대가 펼쳐져 있다. 한편, 남쪽은 중국 농경지대와 맞닿아 있다.  산림지대로 둘러싸인 몽골을 남북으로 가르는 것이 고비사막이다. 중국인들은 고비사막 이북을 외몽골, 이남을 내몽골이라 부른다. '몽골초원'은 외몽골 초원과 내몽골 초원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외몽골 초원은 중앙아시아, 중동, 동유럽과 통하고, 내몽골 초원은 중국과 통한다는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기원전 수세기부터 동아시아 유목민들은 기본적으로 몽골초원 주변의 산림지대에서 출발했다. 칭기즈칸의 조상들 역시 흥안령산맥 북부의 산림지대에서 수렵채집 경제를 영위하는 산림민족이었다. 그러나 수렵, 채집보다는 목축이나 유목이 훨씬 더 안정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산림민족은 항상 몽골초원을 동경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초원으로 진출할 수는 없었다. 뻥 뚫린 초원으로 나갔다가 종족 파멸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냥 산림지대에 남는 것이 더 나았다. 산림지대는 발전 가능성은 낮아도 외적 방어에는 유리했기 때문이다.

 산림민족이 초원으로 진출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초원지대의 정치변동이었다. 초원의 역학구도가 바뀌어 빈자리가 생겼을 때만 산림민족이 진입할 수 있었다. 칭기즈칸의 조상들도 그런 변동을 틈타 초원지대에 진입했다. 위구르족의 패권이 붕괴하고 몽골초원에서 대규모 민족이동이 발생한 9세기 중반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 초원에 진입한 뒤 이들은 기마문화 및 유목문화를 배워 유목민족으로 전환됐다.
칭기즈칸의 조상들은 외몽골 초원의 동부에 자리를 잡았다. 내몽골이 아닌 외몽골 초원에 자리를 잡았다는 점은 훗날 몽골족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이 아직까지 몽골이란 국호를 갖고 초원지대에 웅거하는 비결도 이 점과 관련이 있다.

 산림민족이 외몽골 초원을 지향하느냐 내몽골 초원을 지향하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외몽골초원으로 나가 유목민이 되는 민족은 향후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방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흉노족이나 돌궐족이 서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외몽골 초원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반면, 내몽골초원으로 나가 유목민이 되는 민족은 중국 쪽으로 뻗어나갈 가능성이 있었다.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북위가 북중국을 장악하고 남중국 및 고구려를 압박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농경지대와 인접한 내몽골 초원을 거점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몽골족은 서방 세계로도 뻗어갔고 중국 쪽으로도 뻗어갔다. 동유럽, 중동, 중앙아시아, 중국을 동시에 석권한 유목민족은 몽골족 뿐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외몽골 초원을 장악한 뒤 내몽골 초원까지 접수했기 때문이다. 두 개의 초원을 모두 장악했기에 두 개의 방향으로 동시에 팽창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두 개의 초원 중 어느 쪽을 장악한 민족이 훨씬 더 오랫동안 유목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외몽골을 장악한 쪽이었다.

 내몽골 유목민족은 설령 중국을 정복한다 해도 결국 유목문화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았다. 왜냐하면, 농경지대인 중국을 지배하자면 농경문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 내몽골 유목민족은 중국 농경지대로 나가 농경민족으로 전환되기도 쉬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의 공격을 받아 파멸될 가능성도 갖고 있었다. 본거지가 중국과 가까웠기 때문에, 이들은 항상 이런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  반면, 외몽골 유목민족은 중국을 압박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대신에, 중국의 공격을 받아 파멸될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낮았다. 중국 군대가 외몽골 초원으로 가자면 내몽골 초원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으로 보나 거리로 보나 중국이 외몽골을 제압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외몽골 유목민은 설령 중국 군대에 쫓긴다 해도, 중앙아시아나 중동 쪽으로 도주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흉노족이나 돌궐족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몽골에서 동유럽까지 펼쳐진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여전히 유목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칭기즈칸의 몽골족은 외몽골 초원에서 기반을 잡은 뒤 내몽골 초원으로 나갔다. 다시 말해, 그들의 본거지는 외몽골에 있었다.

 이 점은 몽골족이 대제국의 해체 후에도 여전히 몽골의 이름으로 나라를 유지하는 비결을 설명해준다. 내몽골이 아닌 외몽골에서 유목민족의 첫발을 내디뎠고 그곳에서 기반을 잡았기에, 몽골족은 몽골제국의 잔존세력을 분쇄하려는 명나라 군대의 추격을 피해 외몽골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몽골족이 계속해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은 그들의 출발지가 외몽골이라는 점에 있다. 만약 내몽골에서 출발했다면, 수많은 유목민족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나라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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