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월이다. 새해를 맞으며 각오를 단단히 했던 때가 언제였던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다. 한해의 절반이 지나고, 미국의 가장 큰 휴가철이라고 할 수 있는 독립기념일 주간이 돌아왔다. 독립기념일에는 신문 인쇄소도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번 호 신문은 지난주 신문이 나가자마자 일찍 마감을 해야했다. 급하게 책상에 앉아 기사 정리를 하고 있는데 우연히 이민 초기였던 10여년전에 적은 일기를 컴퓨터에서 찾았다. 이 일기장을 넘기면서 잠시나마 뒤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고국을 떠나 미국에 살면서 힘에 부쳤을 때가 많았다. 가장 짜증이 났을 때는 전화 회사나 수도국에 통화를 할 때였던 것 같다. 담당자와 전화 통화를 하기 위해 30여분 동안 전화기를 들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서 화가 났었고, 전화기를 들고 있는 팔이 아파서 싫었고, 무엇보다도 언어의 장벽을 미리 계산하고 있는 시간이어서 부담스러웠다.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해서 수도국에서 편의를 봐 줄 리가 없다. 30분을 기다렸지만 정작 통화는 3분 안에 끝났다. 자기들 전화 요금 계산이 맞으니 무조건 내야 한다는 간단한 내용이다. 아니라고 바락바락 우겨도 봤지만 내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재검토할 생각조차 없는 것인지 무조건 돈부터 내야 한단다. 그리고 착오가 있으면 나중에 크레딧을 준다고 했다. 한국에서처럼 직접 찾아가서 얼굴을 보면서 따지면 조금 나을 것도 같은데, 그래서 답답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던 이민 초기에는 느릿느릿한 미국의 행정 절차 때문에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한 번은 개인 체크를 분실한 적이 있었다. 훔쳐간 사람이 5백 달러 정도를 사용했는데, 이를 돌려받기 위해서 3개월이 걸렸다. 가만히 앉아 있었던 3개월이 아니라 매일 은행을 찾아가 지점장에게 눈 도장을 찍으면서 읍소를 해야 했다. 서명이 도용된 사실이 정확히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의 진척이 없었다. 금방 처리해 줄 것 같았는데 차일피일 본사의 허락을 변명삼아 미루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직접 가서 말할 수 있는 일이어서 마음이 수월했었다고 일기에 적혀있었다. 일이라는 것이 말이 안 통하는 사람한테 더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일이 나에게만 일어난 것은 아닌것 같다. 얼마 전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지인을 찾아갔는데 그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보험료를 냈는데 안 냈다고 해서 화가 났다면서, 매번 왜 이런지 모르겠다며, 양껏 따지지 못한 것이 분했는지 말 통하는 한국을 그리워했다. 그는 실랑이를 벌이면서 버리는 시간이 아까워 연체료까지 군소리 없이 낸 적도 많았다고 했다. 이런 일이 겹치면 답답한 마음에서 서러운 마음까지 든다고 했다. 이민 와서 전화비, 전기세 몇 푼 더 낸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말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무시당하고 산다는 생각에 더욱 서럽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더 큰 상처도 많이 받는다. 돈 없이 이민 왔다고 가족 형제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동업자에게 사기 당하고, 가지고 있었던 재산 불 나서 홀랑 날리고, 학비가 없어서 학업을 중단하고 군 입대를 선택해야 했고, 같은 동포라고 믿고 일했건만 불법체류자라고 멸시당하고, 신분을 해결하기 위해 위장 결혼까지 해야 했다. 한국에서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에 가난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서 선택한 이민 길이었지만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우리 한인 동포들의 이야기들이다. 그 세월이 얼마나 험난하고 힘들었을까 가히 짐작해본다.

 마치 족쇄처럼 옭아매어져 있던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내 자식들은 나처럼 힘든 세월을 견디지 않도록 해주기 위해 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일했다. 밤새 하는 청소하거나 남의 집 허드레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불만으로 가득찼던 나의 일기장도 어느새 감동의 순간들로 하나씩 하나씩 채워져가고 있다. 따져보면 이민생활에서 주어진 고생도 우리가 선택한 길이기에 즐길 줄도 알아야한다. 무더위가 계속되면서 모든 것에 의욕이 상실되고 있다. 비지니스도, 사람관계도 말이다. 무더위 속에서 하루 아니 반나절이라도 시름을 내려놓는 충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번주 우리 신문사도 화요일 마감을 끝내고 휴가를 가질 생각이다. 한해를 중간점검을 하면서 남은 반년에 대한 계획을 다시 세워봐도 좋을 듯 싶다. 우리 모두 올해 마지막 날 쓰는 일기장에는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주인공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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