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은 작가
희망 고문이라고 했던가.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으로 더 큰 괴로움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몇 가지를 더 물어보고 밖으로 나왔다. 정말 어떡하나 싶었다. 우선은 신부님께 알려야 할 것 같았다. 성당에 연락해보니 신부님은 마침 멕시코 성지순례 중이셨다. 사목 위원이었던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 남편은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지만 우선 기도부터 하자고, 갈 길이 멀고 험할 것이라고만 이야기해두었다.
수술날짜가 잡혔다. 부서진 척추 뼈를 맞추는 수술이었다. 수술에 맞춰 요셉 씨의 아들이 찾아왔다. 한국말이 서툰 아들에게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하자 아이가 목 놓아 울었다. 아이의 등을 다독거리며 나도 같이 울었다.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진 것 같은 이민 생활에서 마음이 통하는 이웃의 의미는 그 무엇보다도 크다. 비슷한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비슷한 삶의 현장에서 비슷한 삶의 경험을 했고, 거기서 파생되는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는 동료 의식이랄까. 그런 것으로 인해 우리가 갖는 연민은 얼마간은 상호 교감적이었다. 소주 한 잔을 앞에 놓고 앉아 밤을 샐 수 있는 사람들. 나의 아픔을 자신의 시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것이 이민사회의 동포애다.
수술은 잘 끝났다. 결과는 별다를 게 없었지만 일단 부서진 뼛조각들을 모아서 붙이고 쇠막대기를 박아 더 이상 망가지는 것을 막았다. 긴 수술 후에 아직 떼지 못한 호흡기가 푹푹 들숨을 불어 넣었다. 의식이 돌아오고 호흡기를 떼자 요셉 씨가 제일 먼저 한 질문은 “이제 움직일 수 있어?”였다.
“그건 말이지요, 수술 전에 설명 드린 것과 같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내 단호한 한마디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아직 버리지 못한 미련 같은 희망의 종이연에서 꼬리를 끊어버리는 모진 한마디였다. 그러나 산 사람은 산다고 했던가. 요셉 씨는 지옥 같았을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재활 병동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성실하게 재활에 임했다. 요셉 씨와 부인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 혼자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30년에 걸친 그의 이민 생활.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렸던 시간들. 억센 노동으로 살아낸 시간들. 이제야 겨우 여유가 생겨서 좀 편안해질 수 있었는데……. 인생의 복병은 늘 예기치 못한 곳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삶의 무게가 커다란 십자가가 되어 그에게 지워진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어깨는 굽고 허리는 휘어진 그가 이제는 십자가를 그만 지고 싶다고 떼를 쓰는 것 같다. 이건 아니라며 항변하는 것도 같다. 뭘 그리 잘못했느냐고 따지는 것도 같다. 긴 시간 악다구니를 하는 것 같은 심정으로 살아냈던 것은 이민자의 설움을 극복해보려는 지나친 의지 덕분이었다. 잘 견디었고 잘 참았지만 오늘만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도, 나도, 그의 아내도 편안해질 수는 없을까.
요셉 씨의 퇴원을 일주일 앞두고 귀가를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마침 쉬는 날이었던 나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의 집까지 따라갔다. 문이 얼마나 넓어야 휠체어가 들어가는지, 침대와 변기의 높이와 사이즈는 어떤지, 샤워 시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히 살펴본다. 생각보다 수리가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요셉 씨는 처음으로 혼자 휠체어를 밀며 거실을 돌아 다녔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두 발로 걸어 다녔던 곳을 더 이상 발로 디딜 수 없다는 상황이 너무 낯설어 보였다.
풍금 위에 있던 사진 속 그의 모습을 보았다. 성당의 제대에 페인트칠을 하기 위해 높은 사다리 위에 올라갔다가 찍힌 사진이었다. 나도 울컥 눈물이 솟는데 그와 아내는 더 하겠지. 그가 혼자 울 수 있도록 일행은 밖에서 기다려주었다. 요셉 씨는 붉어진 눈으로 휠체어 바퀴를 밀었다. 문턱을 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휠체어 바퀴를 밀고 밀고 또 밀고 다섯 번을 민 후에야 그는 겨우 턱을 넘을 수 있었다. 앞으로 넘어야 할 문턱은 이보다 훨씬 높고 힘들 텐데. 문 밖에서 그를 기다리던 아내가 울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긴 시간을 우리는 함께 울어야 할까.
이틀 후에 요셉 씨는 햄버거를 사러 가는 훈련도 했고 시내버스를 타는 훈련도 했단다.
아직은 터널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그가 들어서야 할 터널은 정말 좁고 길다. 답답하다고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는 터널을 울리며 커다란 굉음이 되어 반향할 것이다. 어둠의 끝에는 작은 점 같은 불빛만이 놓여 있고 구비를 돌아도 어두운 가로등만 희미하게 빛날 뿐이다. 그 속에서 그는 간신히 잡고 있던 희망의 빛마저 놓칠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앞에 놓인 길은 외길의 터널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