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내일이면 수술을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산통이 하루 먼저 왔다. 오전 내내 초기 진통을 느끼면서도 다음호 신문을 준비해놓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시간이 지체됐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이 필자보다 더 좌불안석이었다. 처음도 아니고 두번째 출산인데도 왜 그리 불안했던지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는 순간 ‘엄마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친정 엄마가 생각나서 분만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힘들고 지칠 때는 항상‘엄마’라는 말이 습관처럼 나온다. 나의 생활습관을 닮은 탓인지 큰 아이도 ‘엄마’를 이유없이 찾곤 한다. 왜 불러 라고 물어보면 “그냥, 어디 있는지 확인하려고” 라면서 실없이 웃는다.  큰 아이를 낳을 때는 한국에 있는 친정 엄마가 시애틀로 오셨다. 건강하지 못했던 첫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서 첫 주를 보냈고, 다음 한 달 동안은 아동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나는 수술을 한 탓에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고 산후 우울증까지 겹쳐 기본적인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였다. 남편은 새벽 일찍부터 일을 나가야 했기 때문에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일은 고스란히 친정 엄마의 몫이 됐다. 한국에서 막 도착한 엄마가 어떻게 미국병원에서 아이를 간호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역시 엄마는 달랐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바디 랭귀지를 했고, 요구사항이 있으면 간호사를 불렀다. 그리곤 물컵을 보여주면서 물이, 기저귀를 보여주면서 기저귀가, 우유병을 보여주면서 우유가 필요하다며 손주가 필요한 것을 모두 챙겼다. 미국에 처음 와서 영어발음이 이상하게 들릴까봐, 문법이 틀릴까봐 걱정하던 우리와는 확실히 달랐다. 단어와 문법을 정확하게 구사못해도 의사와 간호사는 엄마를 정확하게 이해했다.

 큰 아이를 낳을 때 엄마가 오지 않았다면 우리 부부는 미국생활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엄마는 심장에 문제가 있던 큰 아이가 퇴원해서 안정을 찾을 때까지 함께 있어 주었다. 그렇게 석달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공항으로 가는 동안 엄마는 필자의 손을 꼬옥 잡으면서 “너라면 잘 키울 수 있을 거다”라는 말을 되풀이 하셨다. 공항에서 엄마는 울고 서있는 나를 보면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지 발길을 돌려 다시 한번 나를 안아주고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후 엄마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이들의 옷과 양말, 내의, 때밀이 수건, 행주, 프라이팬, 사위를 위한 홍삼정들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주셨다.  대학 다닐 때도 그랬다. 한달에 한번씩은 기숙사에 와서 청소며 빨래며, 철마다 이불도 바꿔 주었다. 한 번은 내가 가지고 있던 셔츠 17장을 모두 꺼내 다림질을 해놓고 가신 일도 있다. 기숙사를 나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하는 동안 대여섯번 정도 이사를 했다. 그 때마다 엄마가 가장 힘이 들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가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올 때마다 어찌나 일을 많이 하고 내려가시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필자는 못된 딸이 확실하다. 서울 딸네집에 오면 맛있는 것도 먹고, 구경도 다녀야 하는데 매번 침대 옮기고, 책상 바꾸고, 빨래하면서 가정부가 따로 없었다. 

 학창시절 엄마는 자주 소포를 보냈다. 박스 안에 들어있었던 사과 1개 , 배 1개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혹 객지생활하면서 돈이 떨어져 사과 한 개라도 못 사먹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엄마의 마음이 진하게 배어있었던 소포였다. 어쩌면 저녁을 먹고 둘러앉아 당신들만 맛있는 과일을 먹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을 수도 있다.
어제 한국에 있는 언니한테서 이메일이 왔다. 엄마가 배추 김치며 깍두기, 깻잎무침, 시금치, 우리 산에서 딴 산나물 무침 등을 해가지고 왔단다. 전날 자정까지 열심히 씻고 다듬고 무쳐서 가지고 왔다면서 이메일에는 함박 웃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엄마는 평생 박봉의 공무원 아내였지만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도 같다고 했다.

 다음주에는 어버이날이 있다. 이제 나도 어엿한 두 아이의 엄마이기에 내 아이들에게 카네이션을 살짝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 엄마가 했던 것처럼 용감하고 무조건적인 강인한 엄마가 되는 것에는 자신이 없다.  20대의 풋풋한 시간, 30대의 아름다운 여인의 시간, 40대의 여유로운 시간을 포기하면서 평생을 자식과 남편에게 헌신하는 엄마를 보면서 딸들은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좀더 당당하고 멋지게, 나를 위해 살아야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엄마가 된 나는 어느새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내 옷을 사기보다는 남편 옷을, 아이들 신발에 눈이 더 가는 것을 보면 어느새 나도 ‘어머니’를 조금씩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아름다움을 가진 이 세상의 어머니, 언제 불러도 가슴찡한 그리운 이름이다. 자식은 어머니를 때로는 투정의 대상으로, 때로는 무시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감히 생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와 상관없이 끝없이 사랑을 베푸는 우리의 어머니, 당신의 한없이 넓고 깊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무례함을 용서하시길. 그리고 이제부터는 여자가 아닌 ‘어머니’의 이름으로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하려 한다.    <편집국장 김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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