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은 작가

아침 6시 30분에 출근하자마자 야간 당번 수간호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온다. “굿 모닝” 하고 아침 인사를 건네도 그녀는 건성으로 받는다.
"지은, 오늘 중환자실에 한국 환자가 셋이나 있어."
"무슨 일인데요?"
"자동차 사고! 밤에 들어왔는데 다들 한 차에 타고 있었대."
야간 당번 간호사로부터 인계를 받기 전 우선 환자의 이름부터 살펴본다. 그리고 몇 가지를 확인하기 위해 병실 문을 두드린다. 병실에 들어서니 역시 아는 얼굴들이었다.
"오, 글라라!"
그녀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근심이 가득했다. 글라라는 성당에서 불리는 내 영세명이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한국 사람들끼리 가을 소풍을 갔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온천이나 다녀오기로 의기투합했고 일요일을 택해 길을 나섰던 것이다. 산동네에 산 것이 벌써 30년. 해마다 찾아오는 계절임에도 가을은 늘 어떤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들은 황금빛 잎사귀들을 비늘처럼 찰랑대며 군무를 펼치는 황홀한 자작나무 숲으로 떠났던 것이다. 금상첨화로 산에는 온천도 있었다. 물은 적당히 뜨거운 데다 피부에 좋다는 소문도 있어 하루 종일 물속을 들락거렸다. 휴일 하루를 보내기엔 그만이었다.
좋은 시간을 함께하고 돌아오는 길, 산은 금세 어두워졌다. 꼬불거리는 산길을 거의 다 내려와 평지와 만나자 졸음이 슬슬 쏟아지기에 시작했다. 순간 차가 기우뚱하며 한쪽으로 심하게 흔들렸다. 까무룩 정신을 잃었나 싶었는데 차가 굴렀고 신음 소리도 들렸다. 지나던 차들이 멈춰 섰고 얼마 되지 않아 경찰차와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그리고 모두들 병원으로 실려 왔다. 몇은 응급실에서 바로 퇴원했고, 또 몇은 일반 병동에, 또 몇은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환자는 성당 교우였고 부인도 성당에서 자주 보던 이였다. 요셉 씨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차트에는 “흉추 11, 12번 완전 골절, 요추1~4번 복합 골절 그리고 척추 골절에 의한 하반신 마비가 의심됨. 척추 마비에 의한 척추 충격 증상도 염려됨”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지면서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환자를 인계받고 늘 하듯이 간호 진단을 시작했다. 호흡, 심박동, 장운동을 측정하는 청진을 마친 후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여 보게 했다. 발가락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릎을 올려보세요. 발로 제 손을 힘껏 밀어보세요. 지금 밀고 계신 거예요?” 이번에도 발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옷핀으로 환자의 발끝부터 찔러보았다. 옷핀이 배꼽 주위로 올라오자 그제야 따끔거린단다. 하반신 마비가 확실했다. 무척 어렵겠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글라라. 이젠 어떻게 되는 거야?"
부인의 말에 나는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모니터에 뜨는 환자의 심박동수와 혈압 등은 모두 정상이라고 답했다.
"그러면 척추는?"
"제가 아무리 중환자실 경험이 많아도 의사는 아니잖아요. 의사에게 물어보세요."
곤란한 상황에서 제일 둘러대기 좋은 핑계였다. 나는 다음 환자를 봐야 한다며 서둘러 병실을 빠져 나왔다. 컴퓨터 앞에 앉아 환자의 상태를 기록하면서도 이젠 어떡해야 하나 싶었다. 요셉 씨는 미국으로 이민 와서 참으로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다. 페인트 사업으로 돈도 꽤 모았고 생활 기반도 단단하게 잡혀서 이젠 여행이나 하며 즐겁고 여유롭게 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민 3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여행을 계획하고 일거리가 적은 1월쯤을 목표로 준비를 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렇게 큰일이 닥친 것이다.
다시 병실에 들어서자 부인이 거듭 물었다.
"심각해?"
나는 다시 답을 피하며 밤에 잠은 좀 잤는지, 마실 것이라도 좀 가져다줄지 등등을 물었다.
"마비인 거야? 척추 마비?"
더 이상 답을 피하기는 힘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떡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오, 하느님 맙소사."
부인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은 입속에 걸려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꺼억대는 신음 소리는 목울대를 넘지 못했다. 부인은 온몸을 떨었다. 그 떨림이 내 어깨를 지나 가슴에까지 전해졌다. 나는 부인의 울음이 멈출 때까지 가만가만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요셉 씨는 천장만 응시한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안 될까? 가망은 전혀 없는 거야?"
"기적이라는 것이 가끔 있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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