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시티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다. 이탈리아 수도 로마 안에 있는 이 바티칸 시티는 엄연한 독립국이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룩셈부르크, 모나코와 같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에 속하는 국가를 여럿 다녔지만 이 바티칸 시티는 유독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다. 작지만 큰 나라였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바티칸 시티는 전 세계 가톨릭의 중심지이다. 역대 로마 교황들이 수집한 조각이나 회화, 진귀한 문화유산들이 즐비한 역사적인 장소라고 배웠던 기억이 나면서 바티칸 시티를 들어서는 발걸음은 참으로 신이 나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봤던 예술작품들을 보면서 많이 설렜다.
성 베드로 광장은 이탈리아 바로크 예술의 거장인 건축가 베르니니가 설계한 유명한 곳이다. 자그마치 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고, 성 베드로 대성당을 중심으로 큰 반원을 그리고 있다. 광장 중앙에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솟아 있어 기념촬영 장소로도 자주 이용되곤 한다. 광장 양쪽에는 1백 개가 넘는 도리아식 기둥이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고, 그 상부는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만든 성자와 순교자들의 대리석상이 광장을 내려다 보고 있는데, 그 아래에 서 있는 내 모습이 한없이 작게 느껴져 숙연해지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다는 성 베드로 대성당은 어떤가. 이 성당은 예수의 제자이자 천국으로 가는 문의 열쇠를 받았다고 전해지는 베드로를 위해 만들어졌다. 성당 내부에는 화려한 예술작품들이 자리잡고 있어 웅장함을 더해준다. 성당 중앙에는 미켈란젤로에 의해 설계된 원형 돔이 있는데 돔 꼭대기에서는 바티칸 궁과 정원, 그리고 성 베드로 광장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당시 나는 성당의 카펠라까지 올라가기 위해 삼십 분 넘게 줄을 섰다. 어디로 가는 계단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줄 끝머리에 합세를 한 것이다. 앞 사람을 따라 끝도 보이지 않는 계단에 첫발을 내디뎠다.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린 보람도 없이 몇 발을 떼지도 않아 후회가 밀려왔다. 덩치 큰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좁은 계단이어서 돌아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할 수 없이 앞사람을 따라 뒷사람에 밀려 한참을 그렇게 올라가야했다. 7월 무더위 속에서 그 계단을 오르던 시간은 필자의 인내력을 테스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카펠라에 오르니 바티칸 시티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까지 유럽에서 보았던 모든 성당들을 다 합친 것만큼의 아름다운 감동이었다. 이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필요했을지는 바티칸 시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서 쉽게 유추해 볼 수 있었다.
학창시절, 친한 친구들과 존경하는 선생님들로 인해 필자는 소위 말하는 전교조 데모 대열에 합세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전교조의 성격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참교육의 선봉에 서고자하는 의지가 넘쳤던 초창기 시절이었다. 근 2년동안 필자는 이 모임에 매달려 있었다. 국가의 녹을 받고 있는 아버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눈을 피해 가며 시위에 참가했고, 징계받을 선생님들을 대신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 입학을 목전에 두고도 자율학습에 참가하지도 않았고, 직접 싸인펜을 구입해 대자보를 쓰고, 집에 있는 냉장고를 털어 도시락을 싸서 밤낮으로 선생님들의 구제를 위해 뛰어다녔다.
하지만 나의 눈으로 본 결과는 똑같았다. 징계를 받기로 처음부터 결정된 선생님들은 학교를 떠났고, 시위에 참가했던 학생들 또한 처벌을 면하지 못했다. 그때 필자는 아무리 용을 써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생각에 그동안의 생활을 접었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지금 뒤돌아보면 당시 필자의 생각이 틀렸던 것 같다. 비록 필자는 오래전 이들의 대열에서 빠져나왔지만, 민중의 소리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더욱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기에 지금의 한국이 가능했다. 그들의 눈물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의 씨앗이다.
지난주 신문마감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중국은 탈북자 강제 북송을 중단하라는 국제사회의 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대량 체포한 탈북자 31명을 북한에 넘겨주었다. 중국의 이번 탈북자 전격 북송은 과거의 전례에 비추어 유례없이 강경한 조치다. 중국은 과거 체포된 탈북자가 이슈로 부각하면 최대 6개월까지는 수감하면서 여론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북송시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국내외에서 강제 북송 중단 여론이 최고조에 달했는데도 체포한 지 보름 만에 모두 북송시켰다. 이 문제를 국제적인 이슈로 만들면서까지 중국을 압박해왔던 한국 정부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여기서 멈추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정권에 따라 탈북자의 명칭도 달랐다. 분단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는 귀순자로, 문민정부 말인 1997년에는 북한 이탈자로,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부터는 새로운 터전에서 삶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는 순우리말인 새터민으로, 그리고 지금은 북한 이탈 주민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탈북자들은 ‘자유 이주민’으로 불려지길 바란다. 그들이 자유 이주민으로 이 바티칸 시티와 같은 찬란한 역사를 가지기 위해서는 전세계인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보이지 않는 눈물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변하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이들을 위한 보이지 않는 눈물이 모이면 언젠가는 이들에게 자유의 열매라는 소중한 결과가 주어질 것이라고 믿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