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성 목사(뉴라이프 선교교회)
감사 주간을 맞이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감사-感謝’이었다. 감사가 무엇인가? 감사는 느낄 感, 사례할 謝, 사례할 사자는 말씀 言변에 쏠射 자가 조합된 것이다. 그렇기에 감사라는 한자를 사용하여 풀어보는 감사란 ‘마음에 느낀 것을 말에 실어 쏘아 올리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그렇다. 바로 감사는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무엇인가? 바로 표현에 인색한 것 아닌가. 가수 심수봉씨가 불렀던 ‘여자의 마음’이란 노래를 보자.
‘사랑한다 말할까, 좋아한다 말할까, 아니야 아니야 난 싫어, 나는 여자이니까.’ 두 번째 소절은 ‘사랑한단 말 대신에 웃음을 보였는데, 모르는 체하는 당신이 미워 미워 미워…’이다. 아니, 어떻게 웃음을 보고 사랑한다고 느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생가슴 앓는 일들이 가정에서, 부부간에 부모자식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다시 생각하여 본다. 그렇다! 감사는 표현되어야 한다. 부부간에, 부모 자식간에,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표현 되어져야 할 것이 감사인 것이다. 표현에 인색한 우리 모습을 생각하며 의식적으로 감사를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 본다.
감사를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사를 알아야 표현할 것이 있지 않겠는가? 감사란 과연 무엇인가? 거창한 물질적 축복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다, 일상에 주어진 모든 것이 사실 감사의 이유이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이 일상의 감사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이 축복이요 감사할 것인지를 잊고 사는 것 같다. 2주전부터 몸이 으슬으슬 아프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데, 계속되는 여행으로 몸이 아주 피곤으로 지쳐 있는것 같았다. 지난주일 시애틀 영어 아버지 학교를 섬길 때도 몸이 아픈 것 같았는데, 그래도 말씀을 전한다는 생각에 무리를 한 것 같다. 월요일부터 평생에 두 번째로 완전히 목소리를 잃어버려 말을 하지 못하고 힘든 육체로 집중하여 사역하지 못한 한 주를 보냈다.
LA 집회 때 한 사모님께서 “목사님은 어떻게 목소리가 변하지 않으셨어요, 아직도 쩌렁쩌렁해요!”라고 하셨을 때만 하여도 몇 해 전 목소리를 잃어 버렸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고, 악기가 좋아서인가보다라고 답변한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돌이켜 보니 큰 소리로 설교 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나의 뜻을 분명하게 전할 수 있는 목소리로 감사하여야 할 터인데, 사실 목소리에 대하여 감사하지 못했다. 오늘도 움직일 수 있는 건강이 있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충분히 감사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니, 모든 것이 감사할 일뿐이다.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도 불평할 것이 아니라 감사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더웠던 여름에, 도대체 겨울은 언제나 올 것이냐고 불평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겨울이 왔는데 우리는 이제 감사하지 못하고, 추운 것으로 불평한다.
지난 주 한 성도님께서 선물로 주신 도종환 시인의 시집을 보았다. 새로운 마음으로 읽어가다, 마주친‘저녁기도’라는 시, 그 시에 등장한 한 연이다. 우리가 가난과 굶주림에 쓰라려 넘어질 때/평등과 평화를 이루려는 믿음 작아지지 않게 하소서/우리의 다른 또 한 팔로 상처를 감싸며/두 무릎이 남았음을 알게 하소서 여러 가지 경제적인 불황 속에 잃어버린 것이 많은 것 같은 2011년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아직도 서 있을 수 있는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지 않은가? 도종환 시인이 사랑하는 아내가 암으로 함께 투병하며 쓴 시, ‘암병동’에 등장한 시구로 오늘 칼럼을 맺는다.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믿음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온 세상이 암울한 어둠뿐일 때도/ 우리들은 온 몸 던져 싸우거늘/ 희망이 있는 싸움은 진실로 행복하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