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와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사회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해외동포에게 주어진 참정권 때문이기 이전에 우리가 한국인 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필자의 마음은 도가니 같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도가니 말이다. 지난주 우리 편집팀장이 소설책 여러권을 사무실에 가지고 왔다. 그 중 소설가 공지영씨가 집필한 <도가니>가 유독 눈에 띄었다. 하지만 섣불리 이 책을 선택하지 못하고, 다른 책을 골라 읽기 시작했다. 첫번째 책을 다 읽고도 도가니 책을 집어들기까지에는 몇일이 걸렸다. 이 중대한 사건을 읽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이 미리부터 답답했다. 지금 한국은 실화를 바탕으로한 영화 도가니로 인해 그야말로 광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원작 소설 도가니에 제목과 관련한 구절이 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여주인공이 아마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은 지금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있어요.”

   도가니는 광주 인화학교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다. 광주 인화학교는 우석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청각장애인 특수학교이다.  사건 주요 가해자는 재단 이사장 첫째아들인 2대 교장과 둘째아들인 행정실장이다. 성폭력사건 가담자는 이미 은퇴한 사람까지 합치면 10명이 넘는다. 이들은 2000~2004년에 걸쳐 장애학생들 10여명을 상습적으로 성폭력해왔다. 한 교직원이 2005년 장애인 성폭력 상담소에 제보하면서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해 말 MBC PD수첩에서 ‘은폐된 진실, 특수학교 성폭력사건 고발’ 이라는 제목으로 사건이 보도되어 잠시 술렁였다. 이로 인해 전 행정실장과 재활교사 등 2명이 성폭행 혐의로 구속됐지만, 교장은 항소심에서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구형으로 실제 징역 기간이 없었다. 행정실장도 항소심에서 10개월 집행유예로 실제 징역 기간은 없었고 평교사 한 명만 징역 10개월을 구형받으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 지어졌다. 교장은 아무런 법적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지난 7월 췌장암으로 무사히 사망했고, 성폭력 가해자, 책임자는 현재까지도 정식 출근을 하고 있다. 학생을 도운 교사는 결국 해임됐다.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이 2006년 세상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감독 기관인 광주시 교육청은 학교 폐쇄 등을 외면한 채 오히려 예산까지 지원해왔다. 그리고 지금 학교는 골치아픈 청각장애인보다 돈이 되는 노인복지시설로 바꾸기 위해 학교 이름 개명 신청 절차 중이다.

   이렇게 묻혀버렸던 사건이 소설로,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지금 한국은 다시 들끓고 있다. 대통령까지 영화를 봤다. 소설과 영화속 가담자들의 행동은 극히 소극적으로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필자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몇 일전 공 작가가 아이를 묶어놓고 성폭행을 하고 난뒤 그대로 묶어 두고 퇴근을 한 교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들으면서, 실제로는 더욱 잔인했었다는 사실에 치가 떨렸다.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하는 장애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선생이라는 이름의 인간들이 개보다 못한 짓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당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변호사는 “훌륭한 교육가문의 자제에게 이런 저질스런 죄명을 덮어씌운다”고 했다. 처음부터 교육계와 얼키고 설켜있는 권력을 장애인과 인권위의 힘만으로는 이길수없는 싸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사건이 발생한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인화학교 폐쇄 결정이 내려졌다. 성폭행이나 성추행을 당해도  만취상태라서 기억이 안난다고하면 무죄인게  한국이다. 도가니 사건의 ‘솜방망이’ 처벌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같은 시기 미국서 열린 아동 성폭행범의 처벌이 눈길을 끌고 있다. 당시 미국 텍사스 법원은 가해자에게 무려 4060년형을 부여했다. 지난 2008년 미국 텍사스에서 열린 아동 성폭행범 제임스 케빈 포프(43)의 재판으로 이 시기 한국에서는 ‘도가니’ 성폭행 용의자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당시 인화학교 성폭행 용의자들은 대부분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가해자들과 합의해 고소를 취하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재판 결과는 한국과 매우 달랐다. 가해자 포프는 미성년 소녀 3명을 2년에 걸쳐 성폭행하는 등 43가지 혐의로 기소됐으며 총 4060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40가지 혐의에 대해 각각 100년씩, 나머지 3가지에 대해선 각각 20년형이 내려진 것이다. 더구나 미국은 아동성폭행의 경우 피해자와의 합의와 상관없이 형사처벌되기 때문에 포프는 형벌을 피할 수 없었다. 포프는 재판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항소심 역시 “1심 판결에 아무런 법률적 하자가 없다”며 4060년형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포프는 서기 3209이 되어서야 가석방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판결이 내려진 어떤 사건에 대해 두 번 이상 심리 재판을 하지 않는다는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 때문에 도가니 사건이 다시 법정에 설 희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국민의 힘을 믿어볼 수 밖에 없다. 가담했던 모든 교사들의 신상을 공개하고, 사형대에 올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번 도가니 사건을 계기로 한국은 성폭행 범죄에 대한 국민의식과 처벌 기준을 확립하는 전기가 마련되길 기대해본다. 또 피해 학생들에게 보상할 방법도 하루 속히 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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