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린의 행복찾기>
담낭암으로 6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여주인공이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을 적은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해보며 멋진 남자 주인공과 가슴아픈 사랑을 하는 드라마 ‘여인의 향기’가 종영했다. 솔직히 드라마 내용보다는 남자 주인공으로 나오는 배우 이동욱 덕분에 주말이 즐거웠다.
한류를 이끄는 한국 드라마의 열풍은 과히 폭발적이다. 작년에 베트남으로 가족 여행을 갔는데, 그곳에서 한류를 실감했다. 호텔에서 텔레비젼을 켜서 채널을 돌리다보면 베트남어를 능숙하게 하는 배용준이 출연하는 ‘겨울 연가’도 나오고, 더빙을 하지 않고 베트남어 자막을 넣어놓은 한국 드라마들도 수시로 방영됐다. 베트남에는 밤에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모여 저녁을 먹으며 텔레비젼을 보곤 하는데, 거리를 지나가다보면 한국 드라마를 넋을 잃고 시청하는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 또 베트남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면, 꼭 자기가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 이야기를 하며 재밌다고 난리였다.
그런데 한국 드라마에는 일정한 공식이 있다. 몇가지 축이 있는데, 대부분의 드라마는 그 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거나 최소한 한두가지는 이 공식에 부합한다. 첫번째, 캔디형 여주인공과 재벌남이 사랑에 빠진다. 가난하지만 순수하고 명랑하고 씩씩한 여주인공과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잘생긴 재벌남의 사랑은 현실에서는 로또 당첨보다 더 힘들지만, 드라마 속에서는 흔하디 흔한 장면이다. ‘여인의 향기’에서 이동욱이 분하는 강지욱 본부장만 해도 그렇다. 현실에서 본부장들은 다 배나온 40-50대 아저씨들인데, 어째 한국 드라마의 본부장들은 모두 완전 멋진 재벌집 외아들에, 젊은 총각에, 성격은 좀 까칠해도 결과적으로 지고지순하게 여주인공만 사랑한다. 한국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은 최소 재벌은 아니더라도 준재벌 이상 되어야 한다. 돈 없고 외모가 떨어지는 남자 주인공 나오는 드라마는 별로 인기도 없다. 하지만 여자 주인공은 예쁘기만 하면 된다. 돈 없어도 된다. 차라리 ‘신기생뎐’에서처럼 귀신이 나오고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것이 오히려 더 현실감이 있어보인다.
두번째, 꼭 두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는 예쁜 여자가 나온다. 이 여자는 대부분 남자 주인공의 수준과 비슷한 레벨의 재벌집 외동딸이거나 대단히 잘나가는 집안 출신이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은 쌀쌀하게 이 여자를 밀어낸다. 어느 시점에서 둘은 잘되는 듯 하지만, 결국 이 여자는 들러리로 밀려난다. 절대 남자 주인공과 끝에 연결되는 일이 없다.
세번째, 남녀 주인공들 사이에 꼭 한번의 큰 오해가 있다. 하지만 답답할 정도로 여자 주인공 혹은 남자 주인공은 입을 조개처럼 꼭 다물고 그 오해를 키운다. 그래서 둘은 결국 헤어지게 되나 서로를 그리워하며 세상 다 산 것처럼 괴로와한다.
네번째, 꼭 여자 주인공의 친구가 나온다. 그 친구 덕분에 오해가 풀려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아니더라도 여자 주인공의 친구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거나 감초 역할을 한다.
다섯번째, 여자 주인공을 좋아하는 또다른 남자가 꼭 있다. 그 남자는 남자 주인공처럼 잘 나갈 수도 있고, 허접한 집안 출신일 수도 있지만, 공통적으로 여자 주인공에게 매우 헌신적이다. 대부분 성격이 매우 자상해서 시청자들로부터 동정표를 많이 얻는 편이다. 여자 주인공은 미적지근하게 이 남자와 양다리를 걸치는 모양새를 함으로써 혹시나… 하는 기대심리를 갖게 하지만, 결국은 남자 주인공에게 밀려난다. 절대 여자 주인공과 잘되는 일이 없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드라마 중에 이 공식에 충실한 드라마가 있는가? 아마 순식간에 최소한 한두개는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이 공식을 줄기차게 우려먹는 한국 드라마는 여전히 인기가 있다. 욕하면서도 보는게 한국 드라마이다.
드라마는 허구이다. 현실을 반영하는 것도 좋지만, 꼭 고달픈 현실을 다시 드라마에서 재확인하기 위해 드라마를 보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며 한시간을 행복하게 보낸다면 드라마는 그 역할을 끝낸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도 고달픈 현실을 잊고 웃을 수 있게 만드는 한국 드라마를 사랑한다. 그들에게 한국 드라마는 희망과 위안을 주는 치료제이다. 자랑스런 한국 드라마, 길거리에 채이는 것이 재벌집 도련님인 한국 드라마, 말 안된다고 짜증내며 보는 한국 드라마. 그래도 한국 드라마는 재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