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 ‘여호수아’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여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낸 후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르게 된다. 파죽지세로 정복해 들어오는 이스라엘 군대에 주눅이든 기브온이라는 한 족속이 살 길을 찾기 위해 가나안 지역 가까이가 아닌 먼 곳에서 찾아 온 사람들인 것처럼 자신들을 위장하고 여호수아 앞에 화친을 청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실 가나안 지역 안에 살고 있는 소수부족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이들은 여호수아를 속여 살 길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은 여호수아에게 “우리는 원방에서 왔습니다.”라고 거짓 진술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이런 위장술과 속임수에 여호수아가 속아 넘어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화친을 맺어버리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가나안 정복 전쟁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원칙은 가나안 땅에 사는 모든 족속들과는 절대로 화친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들의 속임수에 속아 하나님의 원칙을 저버리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단순히 이들의 위장술에 속아 넘어간 것만은 아니었다. 이 기브온 족속들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만일 우리와 화친의 언약을 맺어 주면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이 되겠다는 말이다. 사실 화친을 맺은 이 후에 이들은 평생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 속에서 종노릇을 하며 살았다. 여호수아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의 이 제안이 얼마나 이득이 되는 제안이겠는가? 평생 곁에 두고 부려먹을 수 있는 종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억지로 종 삼겠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 스스로 종이 되기를 자처하며 재발로 걸어 들어 온 것이다. 말 그대로 호박이 덩굴 채 굴러들어 온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들과 화친을 맺는 일이 “옳은가?”를 생각하기보다, “이것이 우리에게 이득이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 방향을 결정하고 말았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결정하게 되는 동기는 항상 두 가지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이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이득을 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전자의 질문 즉, “이것이 옳은 일인가?”를 따라 행동하게 되면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利)를 놓쳐버리는 손해를 감수하게 되지만 ‘의’(義)를 붙잡는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후자의 질문 즉,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이득을 줄 것인가?”를 따라 행동 방향을 결정하게 되면 ‘의’를 붙잡지 못하고 ‘이’만을 좇는 작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큰 사람은 대의를 위해 눈앞의 실리(實利)를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작은 사람은 당장 눈앞의 이득을 위해서 대의를 포기하는 사람이다. 현대는 실용주의, 실리주의, 편리주의가 난무하는 시대이다. 또한 우리는 정당성과는 무관하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고 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들이 우리의 삶을 때로는 풍요롭게 하고 윤택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들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큰 행동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데 중대한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요즘 우리 주변에 이 교회 저 교회 옮겨 다시는 철새 교인들이 참 많은 것 같다. 교회를 옮겨야하는 행동 결정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왜 교회를 옮겨야 하는가? 참 진리의 말씀을 찾아서인가? 그렇다면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교회를 옮기는 이유가 어느 교회에 가면 쉽게 직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든지, 어느 교회로 가면 세상적인 신분과 지위에 대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든지, 어느 교회로 옮기면 편리하게 부담 없이 교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교회를 옮겨 다니고 있다면 그것은 큰 문제다.

이것은 교회를 옮기는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 보여야 하는 전체 교회의 권위와 그리고 교회다움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교회에 대하여 늘 이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교회를 어머니처럼 섬길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참 크리스찬의 삶은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크리스찬이라면 자신이 믿고 사는 하나님 때문에 영광도 받고 축복도 받지만, 그 하나님 때문에 고난도 받고 때로는 손해 볼 것을 각오하고 살아가는 삶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삼성장로교회 이동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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