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야고보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인내’입니다. 이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나 동일하게 우리는 인내를 필요로 하는 삶의 현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왜 인내가 필요합니까? 세상살이를 가만히 살펴보면 내 힘과 능력으로 되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때로는 한없이 기다려야 하고, 참아 견뎌내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인내야 말로 정말 중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내는 무작정 기약 없이 참고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해야만 하고, 인내할 수밖에 없고, 누구라도 인내할 수 있는, 너무나도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왜 인내할 수 있습니까?
첫째, 주님이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시련 가운데서 인내해야 하는 이유가 주님의 오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야고보서 5:8). 왜 인내해야 합니까? 왜 인내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오시기 때문(the Lord’s coming)입니다. 여기 ‘강림’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루시아’인데, 이 단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 전문용어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 극심한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참고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파루시아’, 즉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위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의 오심이 위로와 소망이 될까요? 야고보는 다시 오실(강림하실) 주님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야고보서5:9). 누가 문 밖에 서 계십니까? ‘심판주(the judge)’이십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심판주’로 오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천년 전에 초림하실 때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지만, 다시 재림하실 때는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주님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며 인내하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억울한 일, 부당한 대우, 고난과 시련을 끝장내시기 위해 오십니다.
둘째, 인내하는 자에게 복된 결말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현세적인 회복의 축복이 반드시 있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야고보서5:11). 어떤 자가 복되다고요? ‘인내하는 자’입니다. 어떤 복입니까? 인내의 사람인 욥에게 주신 그 인내의 결말과 같은 복입니다. 욥의 결말이 무엇입니까?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기42:10). 여기 ‘돌이켰다’는 말은 다시 회복시키셨다는 말입니다. 욥기43:12절에는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그랬습니다. 이것이 욥의 결말입니다. 이 결말을 우리에게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복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내세적인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야고보서 1:12). 여기서 ‘생명의 면류관’은 종말론적인 약속의 축복입니다. 인내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내세의 축복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축복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셋째, 주님의 자비와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순간순간 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 때문에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순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의 손길을 거두시면 우리는 모든 것이 끝장날 수밖에 없는 존재들 아닙니까? 이 사실이 너무나도 절절하게 느껴졌던 한 사람의 고백을 소개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예레미야 애가 3:22-23).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침에 눈을 뜨면 자신이 진멸되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궁하시도록 베푸시는 인자와 긍휼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여기 23절에 등장하는 ‘성실’이라는 단어가 참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에무나’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견뎌내고 참아내고 이겨낸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주의 성실’ 곧, 하나님께서도 그의 백성들을 향한 언약적 사랑을 이행하시기 위해 ‘오래 참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주의 성실하심’ 곧, ‘하나님의 에무나’입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인내’는 사람의 성품이라기보다는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향해 끊임없이 ‘에무나’ 하시는 이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여 오늘도 우리는 ‘인내’를 배워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인내는 ‘우리의 에무나’가 됩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이 ‘에무나’라는 단어를 이렇게 사용했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2:4) 여기 ‘믿음으로 산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에무나’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에무나’, 곧 ‘참아내고 견뎌 낸다.’ 다시 말하면 ‘인내하며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무궁하신 자비와 긍휼 때문에 결코 진멸되지 않을 줄 확실히 믿고, 오늘도 ‘에무나’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덴버삼성장로교회 이동훈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