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말부터 진행됐던 계엄 상황이 2024년에 다시 전개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난 6일 한강 작가가 노벨상 수상을 위해 방문한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연 첫 번째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지난 주 한국에서 발동된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과 맞물려 전 세계의 비상한 관심이 한강 작가에게 끌렸다. 어디 한강뿐일까. 1979년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이후 대한민국에 45년만에 발령된 비상계엄은 온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지난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 계엄을 선포했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이 재빨리 국회에 모여 190석을 만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계엄 해제 요구권 안건을 가결하면서 6시간 만에‘윤석열의 난’은 끝이 났다. 하지만 사상 초유의 계염령 선포였던 만큼 국내외 국민들 대다수가 여전히 혼란을 겪고 있다.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문민정부에서 군 내부 불법 사조직 하나회를 해체한 이후, 대한민국은 문민통제의 길을 개척할 수 있었으며 현재까지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누렸다고 본다. 비록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뼈아픈 민주주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해도, 국가 신인도와 경제에는 큰 타격이 없었다. 당시에는 국회의 탄핵과 헌법재판소의 결정, 그리고 대선이라는 시간표가 제시되었고, 정국은 곧 안정을 되찾았다. 우리가 어떻게 지켜온 민주주의인데, 우리는 지난 주 그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총을 든 군인이 국회에 난입하고, 주요 인사에 대한 체포조가 활보하고, 선거관리위원회가 급습당했다.
이번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전두환 때와 달리 실패한 이유는, 이미 쿠데타를 경험했던 성숙한 국민들의 지지와 야당 국회의원들의 일사불란한 속전속결, 그리고 계엄군과 경찰 병력의 미온적이고 양심적인 대응이 큰 몫을 차지했다고 본다. 무엇보다 동두천에서 택시를 타고 여의도로 달려간 주부, 배달을 하다가 뛰어간 청년, 나라 걱정에 국회 앞에서 밤을 새운 학생들의 행동하는 양심이 있었기에 막을 수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여의도로 와 달라는 호소와 조국의 윤석열을 향한 포효는 구심점이 되었고, 이제와서 윤석열과 거리를 둔 이준석과 한동훈도 양념이 되었을 것이다. 비상계엄은 조직 장악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미 레임덕을 지나 데드덕에 빠진 비리투성이 대통령 부부의 말에 충성할 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현재 지지율 또한 10%대다. 윤 대통령의 어리석은 계엄선포는 이재명의 죄명까지 가볍게 만들어 버렸다.
윤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비상식적이고 충동적인 일을 벌이고 사과나 해명 없이 얼렁뚱땅 넘어갈 때가 많았다. 측근 의원에게 여당 대표를 몰아내 잘했다며 체리 따봉 이모티콘을 보낸 일에 대해선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고 한 게 전부다. 부인의 명품백 수수엔 “모질지 못해서”라며 지나갔다. 이런 게 모두 용인되다 보니‘내 소신을 위해서라면 헌법 파괴 정도는 별 것 아니다’라고 판단하는 지경에 이른 듯하다. 그러니 이번 계엄 선포가 내란에 해당한다는 증거가 수없이 제시되는데도, 며칠 동안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탄핵 표결이 코 앞으로 다가오자 마지 못해 내놓은 1분짜리 사과에서도 “불안과 불편을 끼쳐 송구”할 뿐, 헌정 질서 유린에 대한 인정과 사죄는 없었다. 이번에도 어물쩍 넘어가려 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윤 대통령은 탄핵 표결 직전 대국민담화에서 “저의 임기를 포함해 앞으로의 정국 안정 방안은 우리 당에 일임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조기 퇴진하겠다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대통령의 거취라는 중대 문제를 여당에 떠넘기는 것 자체가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 대통령이 자신에게 닥쳐오는 상황의 심각성과 긴박함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동훈 대표는 대통령 직무정지 불가피를 강조했지만, 탄핵 반대 당론은 유지했다. 탄핵에 반대한다면 투표에 참여해 반대 의사를 표시하면 되는데, 집단 표결 불참이라는 떳떳하지 못한 방법을 택한 것도 자신들의 선택에 명분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표결 불참으로 부결됐지만, 윤 대통령 거취를 둘러싼 상황들은 더 긴박해지고 있다. 또한 야당은 탄핵될 때까지 매주 토요일에 표결에 부친다고 한다.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장은 윤 대통령을 내란 혐의 피의자로 입건해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비상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정치 불안이 한국의 대외 신인도를 갉아먹을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우리 경제를 바라보는 외부 전망이 부정적으로 고착되면 그 자체로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 케이팝, 케이푸드, 케이문화에 열광하고 있는 전 세계에 한국의 이미지는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있다. 여행 위험 국가의 리스트에도 올라갔다. 야당은 대통령에 이어 국무총리까지 탄핵을 준비하고 있다. 자칫 무정부 상태를 불러올 수 있다. 정치권은 이제라도 대외적 이미지를 제발 고려해주길 바란다.
윤 대통령의 종착역은 중도 퇴진으로, 사실상 정해졌다. 국정을 농단한 죄, 국격을 추락시킨 죄, 내란을 도모한 죄를 물어 탄핵 고속열차는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질서 있는 하야 대책을 내놓고 나라를 정상화시키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또한 그 방안은 당이 아니라 대통령이 직접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들끓고 있는 민심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에게도 여당에도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 전 국민이 납득할 만한 퇴진 로드맵을 속히 제시해야 한다.
<발행인 김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