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4년여 만에 핵 사용 교리(독트린)를 완화했다.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을 둘러싼 국제상황의 변화에 맞췄다는 이유에서다. 프랑스와 같은 나토 일부 회원국에서 파병론까지 제기하는 터에 러시아는 서방의 직접 개입을 억지하기 위해 핵 교리 개정으로 초강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개정 핵 교리를 승인하자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우리의 원칙을 현재 상황에 맞출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개정으로 ▲ 러시아와 동맹국인 벨라루스의 주권과 영토 보전에 중대한 위협을 주는 재래식 무기 공격이 있을 때 ▲ 러시아와 동맹국에 대한 핵무기 및 대량살상무기 공격이 있을 때 핵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됐다.

러시아가 핵무기 사용을 결심할 수 있는 상황이 '국가 존립을 위협할 때'에서 '국가 주권과 영토 보전에 중대한 위협을 줄 때'로 완화된 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다.

개정 핵 교리에는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은 비핵보유국에 의한 어떠한 공격도 공동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기존 교리에서 러시아가 핵 억지력을 주로 핵무기 보유국을 대상으로 했던 것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 핵보유국 미국, 영국, 프랑스의 지원을 겨냥한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장거리 무기로 러시아 본토를 타격할 수 있도록 이미 승인했고 프랑스 등 다른 서방 국가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러시아가 가장 경고했던 결정이다.

시간상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로 미국 미사일을 발사한 뒤 이를 보고받았을 푸틴 대통령이 새 핵교리에 서명했다.

러시아는 다만 핵무기 사용이 국가 주권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최후 수단이라는 기본 원칙이라는 점도 교리에서 강조하고 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러시아가 항상 핵무기를 억지 수단으로 간주해 왔다"며 "러시아가 대응해야 강제적인 상황에서만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 교리는 또 잠재적 적의 항공기, 미사일, 드론을 이용한 대규모 항공 우주 공격에도 핵 보복을 고려할 수 있으며 적이 우주에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배치하는 것도 위협으로 간주한다고 명시했다.

러시아의 핵 교리 개정을 '엄포'로만 볼 수 없는 정황도 주목된다. 러시아는 핵폭발로 인한 방사능 오염에서 자국민을 보호하는 모듈형 이동식 대피소 'KUB-M' 대량 생산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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