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선교회 조완길 목사
도시에 살고 있는 어린 손자가 시골에 살고 있는 할머니를 방문했다. 할머니는 손자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고 함께 놀아주었다. 다음 날 아침에 할머니는 손자를 데리고 마을에 있는 야산을 오르게 되었다. 그곳에는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할머니는 손자에게 도토리를 주워 오라고 했다. 손자는 신이 나서 흩어져 있는 도토리를 많이 주워가지고 와서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도토리를 이렇게 많이 주워서 무엇을 하려구요? 응, '이 도토리로 맛있는 묵을 만들어서 너에게 주려고 한다'. 그때 손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할머니, 이 도토리는 겨울에 다람쥐가 먹는 밥이어요’ 할머니는 도토리를 보면서 묵을 생각했으나, 손자는 도토리를 동물의 밥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토리에 대한 할머니와 손자의 인식의 차이는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세계관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 사람 안에 내재되어 있는 세계관이 작동해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은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관계없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분리될 수 없는 삶 그 자체이며 일상적인 경험의 문제다. 세계관은 문화권 속의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전이되며, 문화권 속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세계관의 차이는 긴장과 갈등을 일으킨다. 세계관이란 용어는 계몽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저서 판단적 비판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독일어 벨트(세계)와 안샤웅(관점)을 조합한 신조어다. 19세기에는 헤겔에 의해서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는 모르면 안 될 상투어가 될 정도로 유행하였다. 이것이 영국과 미국으로 전파되어서 월드뷰로 번역되었고 그 개념이 동아시아에 전달되면서 세계관 즉 시간과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정착되었다.
세계관이 정립되기 전 중세 유럽의 문화는 기독교 전기 문화와 후기 문화로 구분이 된다. 전기 문화에는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시기에 철학은 신학을 설명하는 학문에 불과했다. 그러나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인간 중심의 문화로 전환이 되기 시작했다. 곧 기독교 세계관에서 자연주의 세계관으로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 여파로 프랑스 대혁명과 독일의 범신론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중세 사람들에게 자연주의 세계관을 심어주었다. 이 사상의 중심 내용은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기본이 옮겨지는 것이다.
자연주의 세계관을 학문적으로 체계화 시킨 것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이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세계관을 감각적 인식이라고 했다. 그는 인식의 주체가 지성임을 강조하므로, 인간이 인식의 중심무대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헤겔(1770-1831)은 하나님이 절대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의식 속에 스며들었고,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인간의식을 통하여 자기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고 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의존하는 의존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인간이 신에 대한 존재의식을 가질 때에 비로소 존재하는 신이 되었다. 빌헬름 딜타이(1833-1911)는 역사 안에서 객관화된 삶 곧 상대주의를 강조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하나의 절대적이고 보편타당한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유동적인 역사적 산물이며 그것도 하나의 세계관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세계관으로 존재하며 어느 하나도 전체를 말하지 못한다. 오직 하나의 관점을 가질 뿐이라고 했다. 니체(1844-1900)는 사물을 인식하는 어떤 형태의 초월적인 근거도 완전히 사라졌다. 오직 자연이 존재하고 역사가 다스린다는 기초위에 삶을 해석하고 문화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무신론적 세계관이 지성과 문화의 주도권을 장악한 상황은 기독교 복음에 엄청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총체적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모든 사물과 삶을 해석하는 틀로서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게 되었다. 그 중심에 제임스 오어 (James Orr 1844-1913)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가 있었다. 오어가 세속의 공격으로부터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이 기독교 세계관이다. 기독교가 직면한 도전은 기독교의 특정한 교리에 국한된 공격이 아니라 세상과 삶의 전 영역에서 밀려드는 총체적 공격이었다. 따라서 오어의 신학적 과제는 기독교의 특정한 교리를 방어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을 하나의 총체적인 세계관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현대주의 세계관을 하나님 주권에서 인간 주권으로 옮겨간 새로운 형태의 종교라고 정의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세계관의 전쟁은 단순히 종교와 과학간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삶의 체계와 인간 중심적인 삶의 체계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자연주의 세계관 이후에 나타난 허무주의, 실존주의, 동양의 범신론적 일원론, 종교 없는 영성을 주장하는 뉴에이지, 모더니즘에 반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이슬람 세계관으로부터 복음을 변증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스룹바벨과 느혜미야의 믿음이 필요하다. BC 516년에 스룹바벨이 성전을 세웠지만 성벽이 없으므로 외적의 침입이 잦았다. 느헤미야는 하나니로 부터 예루살렘의 소식을 들은 후에 금식하고 왕에게 간청하여 성벽을 건축하게 되었다(파악. 보완. 분업). 기독교 세계관을 지키는 것은 성벽을 재건하는 일과 같다(느4:17-18). 기독교 세계관의 중심 내용은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