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가상 화폐 ‘테라 · 루나’ 폭락 사태의 주범인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 측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약 6조 4200억원(46억7800만달러) 규모의 환수금 및 벌금 납부에 합의했다. 미국의 증권거래위원회는 2021년 11월 권씨와 테라폼랩스가 투자자들을 속여 거액의 투자 손실을 입혔다면서 민사 소송을 제기했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번에 합의한 금액이 “암호 화폐와 관련한 가장 큰 규모의 벌금에 해당한다”고 전했는데, 이날 합의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 투자 피해자 사이에선 권씨와 테라폼랩스가 거액의 벌금에 합의할 정도로 큰돈을 여전히 은닉 중인지, 또 미국 정부가 그나마 남은 돈을 다 가져가면 한국 피해자 구제는 요원해지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른바 ‘테라·루나 사태’는 권씨가 만들어 ‘안전하다’고 주장했던 가상 화폐 테라·루나 가치가 2022년 5월 사실상 ‘제로(0)’로 폭락해 투자자들이 거액을 잃은 사건이다. 한때 루나와 테라는 세계 암호화폐 순위 8위까지 올랐다. 이를 만든 사람이 권씨 이고, 테라폼랩스의  공동 CEO이다. 그는 만 32세, 강남 도련님으로 소위 말하는 8학권 대치동키즈 출신이다. 대원외고를 졸업하고, 스탠퍼드 대학에서 경제학, 컴퓨터 과학을 전공한 매우 똑똑한 인재로 알려져 있었다. 육군 병장으로 병역의 의무까지 충실히 마친 권씨는 2018년 암호화폐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친 테라폼 랩스를 설립했다. 그러면서 루나와 스테이블 코인 테라를 발행하게 되는데, 특히 테라의 경우는 '이더리움'에 이어서 2번째로 큰 디파이 플랫폼으로 급부상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권씨는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루나의 가치는 발행한지 2년도 지나지 않아 폭락했고, 투자자들의 손해는 엄청났다. 이때부터 권씨는 미국과 한국에서 사기 혐의를 받으면서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세르비아 등을 전전하며 도피 행각을 이어오다 지난해 3월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 공항에서 가짜 코스타리카 여권을 이용해 아랍에미리트로 빠져나가려다 위조 여권 사용혐의로 체포돼 유죄 판결을 받고 지금까지 복역 중이다. 체포 이후 권씨는 한국으로 송환되어 재판받기를 희망했다. 이유는 미국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면 종신형에 가까운 판결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권씨가 이 돈을 내면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번 소송은 미국과 한국에서 각각 진행 중인 형사소송과는 별개다. 권씨는 뉴욕의 연방 검찰에 상품 사기, 금융 사기, 시세 조작, 증권 사기 등 8가지 혐의로 기소됐다. 블룸버그 통신은 “미국에서 권씨가 받고 있는 혐의의 최고 형량을 모두 합치면 110년형에 이른다”고 전했다. 한국에선 서울남부지검의 금융·증권범죄 합동수사부가 2022년 9월 자본시장법 위반 등 혐의로 법원에서 권씨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받아둔 상태다. 이처럼 권씨는 한국과 미국에서 모두 기소된 상태로, 신병이 어디로 인도될지는 최종 결정되지 않았다. 한국 피해자는 20만여 명, 피해 규모는 3천억원대로 알려져 있다. 정확한 투자자 규모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전 세계 피해액은 50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서울남부지검이 ‘부패재산몰수법’에 근거해 권씨의 재산에 대한 추징 보전을 청구했고, 법원은 이 중 2333억여 원을 인용했다. 이는 권씨가 한국 법원에서 유죄를 확정받을 경우 피해자들이 피해 금액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권씨가 미국에서의 소송전으로 빈털터리가 될 경우 추가로 추징할 재산이 없을 수 있다. 또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재판이 대법원까지 이어진다면 수년이 걸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형사소송 부담이 줄지 않음에도 권씨 측이 거액의 합의금을 내겠다고 한 데는 미국으로 인도될 경우 SEC에 낸 합의금이 형사소송의 형량을 협상할 때 선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같은 범죄를 두고 소송을 벌이는 검찰과 SEC는 사실상 경쟁 관계이기 때문에 형사 재판에 민사 합의금이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권씨를 괘씸하게 보는 사람들은, 그가 미국과 합의를 봤더라도 미국으로 송환되길 바란다. 한국으로 와봤자 제대로 처벌받지 않을 게 뻔하니 미국에서 재판받도록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다. 이는 대한민국의 입법부와 사법부를 향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럴만한 사건이 여럿 있었다. 인천 ‘건축왕’ 사건의 피고인인 남모씨는 올해 초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미추홀구 일대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 전세 사기 사건은 피해액 148억여 원, 인정된 피해자만 191명에 달할 만큼 중대한 사건이었지만 재판부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 형량은 고작 15년이었다. 또,‘청담동 주식 부자’로 유명했던 이희진은 2016년 수백억 원대 불법 투자 유치 및 사기로 구속됐지만 징역은 겨우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고. 만기 출소한 직후에도 다시 ‘깡통 코인’을 발행해 투자자들의 돈 900억원가량을 가로챘다. 이 정도면 판사가 재범을 권장한 것이라는 여론이 조성될 만하다.

    한국은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개의 범죄를 저질러도 가장 무거운 죄에 내려질 수 있는 형량에 2분의 1을 가중하는 가중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래서 두세 명에게 사기를 치나 백 명에게 사기를 치나 형량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반면 미국은 병과주의를 채택해 각각의 죄에 대한 형량을 모두 합산해 처벌한다. 이따금 대규모 금융 사기나 총기 난사를 저지른 이들에게 100년 이상의 징역형이 선고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고객 자금 수십억 달러를 빼돌린 혐의 등으로 미국 연방법원에서 기소돼 지난달 유죄평결을 받은 가상화폐 거래소 FTX의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는 내년 3월 선고공판에서 사실상 종신형인 100년형 이상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사상 최대인 640억달러(약 83조원) 규모의 다단계 금융사기(폰지 사기) 사건을 저지른 희대의 미국 금융사범 버나드 메이도프(2021년 사망)가 2009년 연방 법원에서 징역 150년을 선고받은 사례도 거론됐다. 이러니 권도형이나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운영자였던 손정우 같은 글로벌한 범죄자들이 기를 쓰고 한국에서 재판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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