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선교교회 김교철 담임목사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참 포도나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냥 포도나무가 아니라 `참'포도나무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거짓 포도나무가 있다는 뜻이 깔려 있습니다. 이 포도나무 이야기는 성경 요한복음 15장에서는 결국 `내가 참 포도나무니 너희는 나에게 붙은 가지가 되어서 내가 만들어 내는 열매를 맺히는 자가 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지금 인간들의 모습은 참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참 포도나무 비유를 도입하신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의와 거룩과 생명과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근거 속에 있으며, 누구의 뿌리 속에 있으며, 누구로부터 생명과 진리가 연결되어 있어야만 되는가를 확인시키고 싶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15장1-2을 살펴보면,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포도나무의 나무 된 것과 가지와의 연합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이고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결국 열매를 맺자'라는 뜻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5장4절을 보시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오히려 어디에 `거하느냐?'로 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종자가 다른 자가 되는 것에 그 핵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간절히 사모하고 소망하고 구해야 할 것은 종자가 다른 자가 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슨 열매를 맺을 것이냐가 아니라, 종자 자체가 어떻게 바뀔 것이냐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맺는 열매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으로 바뀌었느냐를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된 자입니다. 신자가 되고 나서 가장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이제 내가 진리를 알았고 하나님을 알았으니 이제 하나님을 위하여 살리라!'고 자꾸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종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바꾸어진 것이 없이는 아무리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된 자' 즉 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올 때에 맨 처음으로 꺼내 놓는 말과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이지 `내가 오늘 무엇을 갖고 왔습니다'는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의 문제입니다.
그래도 내가 지난 일주일 동안 신자답게 살지 못했지만 많은 유혹과 환난을 뿌리치고 나왔다'고 위안을 받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격과 감사가 그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그토록 엉망으로 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오늘도 어김없이 여러분을 붙잡아 나오시는 겁니다. 이것은 훨씬 운명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뭔가를 했을 때에는 자신이 있지만, 신앙생활에서 실패하면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 같아 얼마나 많은 의심과 좌절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을 소위 예정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사랑 그리고 능력에 관한 질문들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 생기는 갈등을 물어오는 대부분의 경우가, 내가 한 짓에 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다 혹 버리기도 했다 하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함에 관한 문제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예정과 사랑과 능력이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왜 신자들이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까? 그것은 어느 구석엔가 하나님앞에서 떳떳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금 떳떳해서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아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표본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우리를 옥토에 심어주고 우리에게 거름을 많이 준 것으로도 우리가 안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참 포도나무가 되어 우리를 그 가지로 삼는 식으로 구원을 베푸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비로소 참 포도나무라는 비유를 왜 등장시켜야 했는지 그 굵은 핵심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래는 우리를 좋은 종자로서 좋은 열매를 맺히는 포도나무로 의도하셨으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가서 돌 포도나무 즉 이방 우상을 섬기는 죄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확인시켜 주는 도구가 바로 율법입니다. 이제 이 상태로는 아무리 거름을 많이 주고 애써도 우리가 포도나무가 아닌 다른 종자인 이상 죄인 된 열매밖에 맺힐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으로서 종자를 바꾸는 방법뿐입니다. 즉 참 포도나무에 접붙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타락했던 인간을 포도나무 비유식으로 하자면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가 되어 우리를 그 가지에 접붙이시는 것입니다. 가지는 자기가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우리의 근거이거나, 우리의 책임자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농부요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입니다. 바로 그, 참 포도나무에 접붙여 가지된 자가 신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