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차르’(황제)라 불리는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화요일 크렘린궁 대궁전 안드레엡스키 홀에서 취임식을 갖고 새 임기 6년을 시작했다. 푸틴은 지난 3월 끝난 러시아 대선에서 87%에 이르는 압도적 득표율로 대통령 5선을 확정 지은 바 있다. 그는 2000년 첫 대통령에 당선된 데 이어 2004년, 2012년, 2018년 대선에도 승리를 거두었다. 2008년 대선에서는 연임 제한 조항에 걸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푸틴 총리 체제로 4년을 보냈지만, 당시에도 실권자는 푸틴이었다. 2020년 개정된 헌법으로 푸틴 대통령은 2030년 대선에도 출마가 가능하게 되었고, 이때 승리를 거둘 경우 2036년까지 정권을 쥘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의 나이가 1952년생, 바이든 대통령 1942년생, 트럼프 전 대통령이 1946년생임을 감안한다면, 이들 중 가장 오랫동안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서방과의 대립으로 번진 우크라이나전이 장기화되고 있는 국면에서 5기 임기를 시작한 푸틴 대통령은 동요를 잠재우고 전쟁을 지지하는 여론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국주의 교육과 선전 활동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옥중 사망,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 테러 등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을 해결하려 반정부 세력 색출, 언론과 인터넷 통제 등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시작으로 러시아 우호국 정상들과 차례로 만나며 반서방 연대를 견고히 구축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가 새 임기 시작에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러시아와 3년째 전쟁을 치르는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주변 유럽국가들이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벌인 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우크라이나를 돕는 국가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강화를 약속한 영국과 프랑스에 반발해 취임을 하루 앞두고 군에 전술핵무기 사용 훈련도 명령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주요 핵무장 국가의 수장이 핵무기의 잠재적 사용 가능성을 언급하며 위협을 하는 건 무모하고 무책임한 처사라고 비난했지만, 러시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묵묵부답이었다.

    오히려 푸틴은 ‘강한 러시아 부활’의 일환인 우크라이나 전쟁을 향한 공세를 대폭 강화할 것이란 전망이다. 한때 엎치락뒤치락하던 전쟁은 3년 차에 접어들면서 러시아 쪽으로 무게추가 옮겨가고 있다. 푸틴은 지난 2월 국정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목표를 달성하고 국민의 주권과 안보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처를 취할 것이며 러시아군은 막대한 전투 경험을 쌓았다며 타협의 의지가 없음을 천명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당장 중국 방문을 예고했는데, 취임 후 첫 방문지로 중국을 택한 건 중국과 함께 서방에 맞서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북러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북 초청에 응한 만큼 곧 북한을 방문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는 러시아가 중국, 북한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푸틴은 국민 열에 아홉명 가까운 찬성표를 얻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종신집권 체제를 사실상 굳혔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에서 오는 권력의 취약점이 푸틴 집권 5기 기간 동안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란 진단도 있다. 거대 국가 러시아가 기본적인 시스템에 의한 통제조차 없이,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푸틴 개인에 의해 주요 정책 결정이 내려지는 상황이 이어지면 결국 국가 차원의 균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견해이다. 막심 사모루코프 러시아 유라시아센터 연구원은 “러시아 정치 엘리트들은 푸틴의 명령을 이행하는 데 더욱 충실해졌고 그의 편집증적 세계관에 더욱 순종적으로 됐다. 30년 전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위험에 처해 있다. 푸틴의 변덕과 망상에 이끌려 모스크바는 자멸적인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푸틴의 사기는 하늘의 중천에 올랐다. 이번 취임식은 러시아의 국내 행사로 보고 외국 정상을 초대하지 않았으나, ‘비우호국’을 포함해 러시아에 주재하는 모든 공관장을 초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대러 제재에 참여하는 국가들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는데, 한국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도훈 주러 한국 대사는 이번 취임식에 참석했다. 이는 미국, 영국, 캐나다와 유럽연합 27개국 등 서방 대부분 국가의 대사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항의하는 뜻에서 취임식을 ‘보이콧’한 것과 대조된다. 이런 가운데 조태열 외교부 장관도 이달 중순 중국을 방문해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회담할 예정이다. 한국 정부가 우리 국민과 기업의 사정 등을 고려해 대(對)러시아·중국 관계 ‘관리 모드’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푸틴의 취임식에 참석했다고 해서 한국을 마냥 좋게 볼 러시아가 아니다. 러시아는 올해 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우리 선교사를 간첩 혐의로 체포해 구금 중이며, 지난주 러시아를 방문한 한국 복무 중인 미군은 절도 혐의로 현지에서 구금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미국 국적의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 에반 게르시코비치는 지난해 3월 간첩 혐의로 체포돼 1년 이상 구금돼 있다. 한국의 우방국 대부분이 푸틴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가 참석한 것은 국민과 기업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되려 우방국에게 동맹관계에 대한 오해와 불편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러시아가 푸틴 1인 종신집권 체제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향방에 근심이 드리운다. 그러나 풍랑이 거센 때일수록 확고한 원칙과 지향점을 정해놓고 일관성 있게 움직인다면 최선의 국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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