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빛교회 유지훈 담임목사
설교를 잘하시기로 소문난 50대 한인 목사님께서 담임하고 계시던 미국 교회가 있습니다. 200여명이 모이는 이 교회의 성도들은 주로 은퇴하신 백인 노인 분들입니다. 어느 한 주일, 예배가 시작하기 전에 교인들은 예배당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노숙자가 교회 예배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최소 몇 주간 빨지 않은 옷이었습니다. 머리를 감은 지도 오래 되어 보였습니다. 그는 예배당으로 들어와 앞 좌석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모여있던 사람들은 홍해가 갈라지듯 양쪽으로 갈라졌고 이 노숙자는 앞 좌석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노숙자는 예배를 드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해드폰을 끼고 있었고 그 사이로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마도 밖에 너무도 추운 탓에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교인들은 계속 이 노숙자와 목사님을 번갈아 보면서 눈빛으로 목사님께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시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이어가고자 했지만 사람들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제발 이 노숙자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눈치였습니다.
그때, 이 노숙자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예배당을 나갔습니다. 교인들은 그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목사님은 더 이상 설교를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멈추고 교인들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저 노숙자가 우리 교회에 들어 온 것은 기적이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저 사람이 우리 교회에 들어오면 따듯하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 교회가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교회에 들어온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일입니다. 앞으로 그가 우리 교회에 들어오고, 우리 화장실을 사용하고, 예배당에 잠시나마 앉아서 몸을 녹이고 갈 수 있다면 우리는 늘 그를 환영하고 사랑해 줘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상황 가운데 놓였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가 앉은 의자에 냄새가 배면 어떡하지? 냄새가 심하네. 저 사람 때문에 제대로 예배드리기 힘드네. 등등…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예배는 거룩한 것이고 가장 좋은 모습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고, 깨끗하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 노숙자 한 사람 때문에 방해가 되고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없었다면 우리는 화를 내고 짜증을 내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봐도 사지가 멀쩡한 자인데. 저렇게 사는 것은 자신이 게을러서이고, 아마도 마약이나 술에 중독되어 그런 것 같은데. 저런 자가 우리 예배 당에 들어와서 우리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는 것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셨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예배는 경건하게 드리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정돈하고 하나님 앞에 가장 깨끗하고 좋은 모습으로 나와야 되는 것은 맞습니다. 주변에 나로 하여금 주님만 바라보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고 주님 앞에 온전히 나아가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깨끗한 우리의 겉모습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중요할까요? 우리는 때로 “올바른” 것을 위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 때가 많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겉모습보다 그 마음을 더 중요시 생각하는 분이 아닙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긍휼이 여기는 마음, 은혜로 품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사랑, 긍휼, 은혜보다 우리가 생각하는 올바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생각하기보다는 내 자신의 “의”를 세우기에 바쁩니다. 무엇이, 혹은 누군가가 나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만들면 그것을, 혹은 그 누군가를 과감하게 정죄하고 외면하고 나의 삶에서 없애려고 노력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하고 길을 갔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줄 때가 많습니다. 남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우월함을 내세울 때가 많습니다. 서로를 사랑으로 품기보다는 그들을 내가 생각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쉽게 상처 되는 말을 내뱉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서로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요한은 이렇
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요일 3:7a, 개역개정). 사랑이란 내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관점에서 먼저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희생이 요구된다 하여도 상대방을 위해 내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필요를 내가 희생하며 채워주는 삶이 사랑의 삶입니다.남을 위하여 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더럽고, 악취가 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본능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여 주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나는 어떠한 존재였고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여 주셨는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지만,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배반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더럽고 악취가 나는 존재였지만 나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알면 서로를 사랑과 긍휼과 은혜로 품을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나를 통해 따듯함을 얻고, 쉼을 얻고, 격려를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이 과연 있을까요? 사랑으로 서로를 품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