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형제도는 형사법 체계상 존재하지만, 1997년 12월30일 사형이 집행된 이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실질적으로 사형제도 폐지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시작은 김대중 정부 때였지만,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찬반의 목소리에서 가장 큰 쟁점은 ‘오판’의 가능성이다. 

    작년에 시행된 사형 집행 필요성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는 사형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70%가 넘었다. 필요 없다는 응답자는 19%,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 나왔다. 다시말해 사형 집행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3배 이상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사형은 쉽게 결정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법관이 하는 재판에 오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제 인권 옹호 한국연맹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법관 중 35%가 한 번 이상의 오판 경험을 갖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국민의식 조사에서도 사법제도에서 오판 가능성이 있다는 응답이 국민 전체의 93%나 차지했다. 법관은 신중하고 객관적인 판결을 했다고 자부하겠지만, 기계가 아닌 이상 오판의 위험성은 늘 존재해 왔다. 

    오심이라고 하면 대표적인 장르가 스포츠에서 나온다. 올해 한국 프로야구는 세계 최초로 ABS(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를 들여왔다. ABS는 투수가 공을 던졌을 때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를 알려주는 로봇이다. 포수 뒤에 서있는 심판은 이어폰을 끼고 있다가 ABS에서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를 알려주면, 그대로 외치면 된다. 한국에서 이러한 시스템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도입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심판에 대한 신뢰도가 낮다는 얘기가 된다.  

    그동안 오심 논란이 너무 많았다. 심판의 선언은 필드에서 곧 법이었다. 분명 볼인데, 스트라이크로 외쳐도 할 말이 없었다. 이처럼 절대적 권력을 누려왔던 심판이 이제는 ABS 판정 내용을 전달하는 관리자 수준으로 전락한 듯하다. 심판에 대한 불신은 지난주 또한번 도마에 올랐다. 한국 야구 NC 다이노스 이재학 투수가 던진 공에 ABS는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그러나 판정음을 제대로 듣지 못한 심판은 ‘볼’로 잘못 선언했다. NC 측이 항의하자 심판 넷이 모여 의견을 나눴는데, “음성은 분명히 볼로 인식했다고 하세요. 우리가 빠져나갈 건 그것밖에 없는 거예요.” 라는 대화 내용이 TV 중계 방송에 고스란히 잡혔다. 실수를 바로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쿨하게 잘못을 인정하면 되었을 일인데, 기계가 말한 것까지 조작하려고 했다. 곧바로 중징계가 내려졌다.  이러다 경기장내 모든 심판의 자리가 기계로  채워질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이 있었다. 거칠게 항의해 봐야 괜히 퇴장이나 당하니, 억울해도 참고 계속 뛰어야 했다.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 종목 불문이다. 사실 대한민국이 항상 오심의 피해자는 아니다. 분명 오심으로 인해 수혜를 받은 사례도 있다. 그러나 수혜를 받은 것 이상으로 유난히 대한민국은 올림픽에서 오심, 혹은 편파판정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었다. 과거에는 국력이 약해서, 현재는 오심을 당해도 미적지근하게 대응하는 경향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첫 올림픽 금메달은 1976년 양정모 선수가 레슬링에서 받은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20년 일찍, 금메달을 받을 수 있었다. 송순천은 밴텀급에서 결승까지 올라가 동독 선수 볼프강 베렌트와 겨루게 되었는데, 3회전 내내 압도하는 경기를 펼쳤음에도 판정패를 당하고 만다. 당시 심판 4명 중 3명이 공산국가 출신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관중들이 야유를 쏟고 의자를 링 위에 던지는 일까지 있었다지만 그 당시에 판정이 번복될 리가 만무했다. 

    대한민국의 올림픽 전설 역도의 장미란도 오심 피해를 당한 적이 있다. 장미란은 마지막 시기까지 끝마쳤는데, 중국의 탕궁훙이 금메달을 따기 위해 다소 무리한 무게를 들어올리려 했고 위태롭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들어 올렸지만 성공으로 인정된 것이다. 대한역도연맹은 공식 항의서를 제출했으며, 세계역도연맹 총재가‘진정한 챔피언은 장미란’이라고도 했지만 판정 번복은 없었다.

    심판은 ‘심리’와 ‘재판’을 아우르는 말이다. 일상의 심판은 판사다. 그가“아웃”이라고 하면 아웃이 된다. 이달 초 한국리서치가 ‘주요 헌법기관 역할 수행 평가’ 설문 결과를 발표했다. 법원에 대한 긍정 평가는 20%에 불과했다. 재판 받는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나를 주제로 진행된 설문에서는‘AI 판사’(48%)가 ‘인간 판사’(39%)를 눌렀으니 예견된 결과다. 미국은 판사에 대한 신뢰도가 한국보다 높긴 하지만, 같은 법조계에서는 어떤 판사에 오심을 해왔는지 알고 있는 분위기이다. 얼마전 필자와 알고 지내는 지인 판사와 식사를 한 일이 있었다. 필자는 문제가 있어 보이는 판사에 대한 얘기를 꺼냈고, 지인 판사는 대뜸 “혹시 이 판사가 아니냐”며, 덴버포스트지에 실린 문제 판사의 기사링크와 법사위에 고소당한 자료들을 보내주었다. 그 사람이 맞았다. 지인 판사는 더 이상 그에 관한 긴 말을 이어가지 않았지만, 한동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기억이 난다. 

    판사든 심판이든 이들 모두는 막강한 지위를 가졌다. 강한 파괴력으로 개인의 인생을, 더 나아가 사회를 파탄 낼 수 있다. 메이저리그의 전설적 심판 더그 하비는 “내가 옳을 때는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내가 틀리면 누구도 잊지 않는다”고 했다. 제대로 심판해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심판은 정확성의 상징이지만, 실상은 항상 그럴 수 없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니까 실수로 내리는 판정이든, 혹은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편파판정이든, 과거에는 그러한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말로 용인되어 왔다. 그러나 세상이 달라졌다. 기계 심판과 AI 재판관을 더 신뢰하며 ‘인간 심판 무용론’까지 대두되고 있다. 기계에게 심판의 자리까지 내주지 않으려면, 자신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심판대에 세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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