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고등학생일 때 처음으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결성되면서, 일명 전국의 깨우친 선생님들이 교육현장의 개혁을 외치며  전교조를 이끌었다. 지금은 전교조의 성격이 다소 변질되어 극좌파로 인식되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참교육에 소신을 가졌던 선생님들의 모임이었다. 그래서 학교마다 그러한 선생님을 좋아하고 따랐던 학생들은 그 선생님들과 뜻을 같이한다는 의미로 전교조 활동에 동참을 했었는데, 필자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러면서 학교 지침에 반대하는데 앞장서, 보충수업을 거부하는가 하면 전교생을 이끌고 교장실 복도를 점거하면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한번은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전교조를 반대하는 선생님들이 교문을 걸어잠갔다. 하지만 우리는 교문을 뛰어 넘어 잠겨진 자물쇠를 풀어 교내로 진격했다. 그러다가 한 교실의 유리창이 깨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학교 측은 과격 시위로 판단해 경찰 진입을 요청했고, 학생들은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졌다. 다음날 징계위원회가 열리면서 전교조에 가담했던 선생님들은 학교를 떠나야 했고, 학교 진입에 앞장섰던 몇 몇 학생들은 정학을 받았다. 필자는 간신히 정학은 면했지만, 더이상 전교조에 동조하는 집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결국 고교시절에는 학부모를 대동한 학교 측의 강력한 조치로 인해 우리의 뜻은 관철되지 못했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을 했다. 필자는 입학하자마자 대학등록금 인상반대와 정권교체를 외치는 학생회에 가담했다. 집회가 있을 때마다 대자보를 써서 붙이고,  꽹과리를 치면서 앞장서서 분위기를 북돋는 역할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앞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릴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꽹과리에 징, 북을 준비하고, 붉은 색 머리띠에 운동화를 갖춰 신은 우리는 교문 앞 도로를 점거하고 땅바닥에 앉았다. 그리고는 어깨동무를 하고 민중가요 ‘바위처럼’ , ‘아침이슬’ ‘임을 위한 행진곡’ ‘광야에서’ ‘서울에서 평양까지’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부르면서 본격적인 집회의 시작 시점을 기다렸다. 그런데 집회는 좀처럼 시작되지 않았고, 그날은 끝까지 집회를 열지 못했다. 이유는 데모를 저지하는 전투경찰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싸움을 해도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끼리 하는 집회는 거품빠진 맥주 신세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전경은 오자 결국 우리는 맥빠지게 해산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 전교조 집회 이후 맞닥뜨린 두 번째 박탈감이었다. 그 이후로 필자는 무조건 시끄럽게 싸워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라는 허탈함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필자는 이 무리에서도 탈퇴했다.

 
    대학을 졸업하는 해였던 것 같다. 국회 출입 기자로 수습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청량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직접 취재를 나갔다. 지금의  BTS 공연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그 넓은 청량리 역전 앞은 발 디딜 틈없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필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입장하는 모습을 찍기 위해 연단 옆에 자리를 잡았다. 관중들은 그가 도로에서부터 광장을 가로질러 연단에 오를 때까지 환호하고 박수치며 그를 맞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저렇게 흥분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순전히 지역감정 때문일 것이라고만 치부했다. 그러나 그와의 만남은 경상도 출신인 필자를, 그것도 진보 라인에서 두 번의 허탈감을 경험했던 필자를  다시 가슴뛰게 만들었던 순간이었다. 이처럼 필자는 아주 오랫동안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진보 좌파의 무리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 조국 사태 이후로 진보 좌파의 정의는 깨지기 시작했다. 조국 정국을 거치면서 ‘진영적 정체성’은 진보정당과 그 지지자들에게 판단과 행동을 제약하는 족쇄로 작용했다. 경제분야 시민단체에 소속된 40대, 50대 활동가들은 처음 조국에 대해 여러 의혹이 제기됐을 때는 개혁을 거부하는 쪽의 저항으로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혼란이 커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국이라면 이러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말 그대로 멘붕이 왔다. 그러면서 이제는 강력한 우파도, 확고한 좌파도 존재하지 않는, 오롯이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힘을 모아야한다는 정치인들의 움직임이 커지고 있는 추세이다.


    필자의 가족은 박정희 대통령부터, 문재인 대통령 때에도 홍준표를, 이재명 대선 후보 대신 윤석열 현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했던 극우 보수주의다. 경상도 토박이에다 군인 출신의 아버지, 평생 아버지의 뜻을 따랐던 어머니, 그런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언니 오빠 남동생 모두는 여당 성향이 아주 뚜렷하다. 그래서 잠시라도 좌파의 세계에 발 담갔던 필자는 집안의 미운오리새끼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이제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나는 문재인 정부의 성과를 평가하는데 인색했고, 윤석열 당시 대선 후보를 지지하면서 보수의 편에 서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의 보수와 진보의 경계선은 점차 엷어지고 있다. 


    물론 지역색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한국 정치의 불편한 진실이다. 평소에는 지역타파를 외치다가도 선거 때마다 더 깊은 골이 파이는 지역색은 한국 정치에서 절대 사라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 이민사회에서만큼은 케케묵은 지역감정은 배제되었으면 한다. 이민와서 살면서 한국 마켓이나 한국인 경영 식당, 한국인 의사 병원을 선호하는 것은 한국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소속감이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다음 주에 이낙연 전 총리가 덴버를 방문한다. 강연회의 일정이 정해진 후 한국에 있는 친여당인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 이낙연 전 총리가 덴버에 오신대” 하고 말을 꺼내자, 잠깐 말씀을 잇지 못하시다가 “정치색을 떠나 덴버에 오는 손님이니 해 줄 수 있는 건 해드려야지” 라면서 손님의 의미로 받아들이셨다. 다음 주 목요일 오후 5시, 세컨홈 노인센터에서 한인대상 강연회가 열린다. 세컨홈에서 음료와 와인, 스낵, 간단한 식사까지 무료로 제공한다. 지금까지 콜로라도 한인을 대상으로 단독 강연회를 개최한 한국 정치인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지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덴버 교민들도 정치색과 지역색을 떠나서, 이낙연 전 총리를 덴버를 방문하는 손님으로 반갑게 맞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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