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빛교회 유지훈 담임목사

    저는 지금 한국에 방문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그동안 한국에 오지 못하다가 이제 가족들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을 방문하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이전에 한국에 왔을 때와 다른 것은 이번에는 자동차를 한국에 머무는 내내 렌트해서 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전에 전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와는 다른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자동차기 있으니 편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불편한 점들도 많이 뒤따릅니다. 그중 대표적인 불편함은 주차공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사고를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남이 주정차 금지 구간에 주차를 해서 내가 지나가기 불편하면 남을 욕합니다. 하지만 내가 급하게 차를 대야 하면 서슴지 않고 주정차 금지 구간에 차를 대고, 누군가가 불평을 하면 충분히 지날 갈 수 있는데 뭐라고 한다고 말합니다. 남에게는 인색하고 나에게는 참으로 관대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러한 “내로남불”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인간 모두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남이 자랑하면 교만이라고 책망하지만 나는 정말 자랑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자신을 설득시킵니다. 오로지 내 관점으로만 모든 일을 보고 내 관점만이 옳고 진리라고 믿는 모습은 우리의 아주 자연적인 모습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잘 반영했던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나입니다. 요나는 전적으로 “내로남불”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오로지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선지자였습니다. 나중에는 심지어 하나님은 틀렸고 자신이 옳았다고 고백하며 죽기를 간청하기까지 합니다.


    우리에게 요나의 이야기는 매우 익숙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시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도망가는 길 가운데 풍랑을 만나고 바다에 던져지게 되고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내다가 다시 기회를 얻습니다. 그리고 니느웨에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과 논쟁을 버리며 이야기가 막을 내립니다. 


    우리는 요나서를 읽을 때 1장과 3장에 초점을 맞추고 읽습니다. 요나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내려 간 1장과 요나가 니느웨에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3장. 하지만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한 것은 2장과 4장입니다. 2장에는 요나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다시 살았다는 것을 감사로 찬양하는 요나의 기도와 찬양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4장에는 요나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였는지에 대한 자신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감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하였다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어떤 상황일까요? 요나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이 넘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심지어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용서하시는 실수를 범하실 것이니 차라리 내가 다시스로 도망하여 하나님께서 실수하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다는 결심하에 도망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괜찮지만 그들을 안된다 라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의 선지자가 바로 요나입니다. 


    이런 요나의 모습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 내면에 다 이런 모습들이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남에게는 매우 인색한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다 올바른 것이라고 믿지만 남이 하는 일은 비판하는 우리의 이기적인 모습 말입니다. 내가 저지른 실수는 단순히 실수이거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남이 저지른 실수는 절대 용서 못하는 우리의 모순의 모습 말입니다. 요나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은 결국 요 “나”의 모습이 아니던지요? 나의 관점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관점에서 한번 더 봐주고 이해해 주려는 노력이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이 될까요? 한번 더 참고 한번 더 배려하고 한번 더 이해해 주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변화가 되겠습니까?


    사도바울을 이기적인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체험했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조금의 권면이나 격려를 얻었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조금이라도 맛 봤더라면 서로를 자기 자신보다 다 낫게 여기고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닮으라고.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2:5-11, 새 번역).

    요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서로를 위한 그리스도의 마음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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