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이 576돌을 맞았다. 1991년 공휴일이 너무 많아서 경제발전에 지장을 준다는 명목으로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가 2013년부터 다시 부활했다. 매년 한글날에는 집집마다 국기가 게양되고,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한글 문화축제가 예정되어 있다. 이처럼 한글날이 창제 570년이 지나서야 다시 한번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한글의 소중함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글에 대한 관심이 일시적으로 한글날에만 반짝하고 끝나서는 안 된다.  


    한글날은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의 말문에 해당하는 날을 추정한 결과, 늦어도 세종 28년 음력 9월 10일에는 훈민정음이 반포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세종 28년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로 확정되었다. 한글날의 원래 이름은 ‘가갸날’이었다가 일제 강점이었던 1928년 ‘한글날’ 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어찌됐든 한글날의 지금 날짜인 10월9일은 광복 이후에야 온전히 굳어지게 된 것이다.  


    한국의 유명 오락프로그램에서 윷놀이 게임을 한적이 있다. 경기 규칙은 외래어 사용금지였다. 두 팀으로 나뉜 멤버들은 식사를 걸고 대결을 펼쳤는데, 윷놀이를 하는 동안 외래어, 외국어 등을 사용하면 윷놀이 판 위에 있던 말을 처음으로 되돌리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녹화는 장장 6시간동안 진행되었고, 그것도 간신히 게임을 끝냈다는 뒷얘기가 보도된 것을 본 적이 있다.  경기내내 파이팅, 오마이갓, 오케이, 오디오, 팀 등 외래어가 자신들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이른바‘훈민정음 윷놀이’는 영어를 쓸 때마다 판 위에 놓은 말을 모두 뺀다는 그 설정 하나만으로도 큰 웃음과 동시에 엎치락뒤치락하는 드라마틱한 결과를 보여줬다. 그리고 이 게임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많이 일상에서 외래어를 사용하는지도 새삼 깨닫다. 외래어, 외국어 사용이 꼭 나쁘지는 않지만, 남용은 하지 않는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글의 우수성은 디지털 시대가 발전되어 갈수록 빛을 발한다. 표음문자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소리를 글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전 세계 공통 발음기호로 한글을 내세우는 언어학자들이 있을 정도다. 특히 디지털 시대에 한글은 우수한 문자학적 가치도 돋보인다. 최근에 휴대전화 문자 입력에서 영어 알파벳과 일어 히라가나, 한글을 비교하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각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 60명을 대상으로 각자 공통된 뜻을 가진 문자 내용을 누가 더 빨리 입력할 수 있는지를 동일한 조건에서 실험이 진행됐다. 결과는 한글이 영문과 일문보다 빠른 입력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한글 창제의 원리와 관련이 깊다. 이처럼 한글은 문화적, 과학적 가치를 지닌 우수한 문자다. 찬란했던 조선 문화의 상징이자 민족적 자긍심의 원천이다. 창제자와 창제 이유를 아는 세계 유일한 문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훈민정음 해례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사실 고유한 글을 가진 국가는 전 세계를 통틀어 20여 곳 밖에 되지 않는다. 한 민족이 글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우리는 이에 자부심을 갖고 일상생활에서 한글을 가꾸고 지켜나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세계가 인정한 한글이지만 정작 한국인의 한글 사랑은 그다지 깊지 않다. 대한민국 부모들의 지나친 학구열은 가나다보다 ABC를 먼저 배우게 했고, 한국어 만화보다 영어로 된 만화를 접해야 귀가 열린다며 한국말도 못하는 세살배기 아이에게 영어 만화 영화만 줄기차게 보여주고 있다. 한 달에 2백만원이 넘는 영어 유치원은 일찌감치 등록이 마감된다. 공공행사에서 잘못된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는가 하면 방송 등 언론기관에서 사용하는 용어에도 문제가 많다. 공문서, 도로 표지판, 유적지 표석 등에도 틀린 글자가 종종 눈에 띈다. 특히 인터넷이나 모바일에서의 언어 파괴 현상은 심각하다. 신조어가 난무하고 이모티콘, 줄임말 등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문법상 잘못된 표현, 틀린 맞춤법이 예사로 사용되고 있다. 대학생들조차 맞춤법이 엉망인 경우가 많다. 멀쩡한 우리말을 두고 외래어를 쓰는 것도 바로잡아야 한다. 길거리 간판이나 상표명, 단체이름, 전문용어 등에 외국어가 범람하고 있다. 국제화 시대에 외국어를 피할 수는 없지만, 한글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데 꼭 외국어를 써야 할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요즘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욕설이다. 청소년들의 욕설, 은어, 비속어 사용은 도가 지나쳤다. 욕설이 생활이 되다 보니 중 고등학교에서는 ‘욕설 없는 주간’ 이라는 캠페인을 펼치는 등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다. 특히 문자를 보낼 때는 더하다. 이런 욕들을 접할 때면, 욕을 하는 사람이 무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더 우스워 보일 뿐이다. 상대의 인격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도 몇 년 전에 욕이 잔뜩 적힌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2장에 걸쳐 타이핑으로 쳐서 필자에게 보낸 편지였는데, 읽다가 그만 두었다. 욕인 것은 알겠는데, 맞춤법은 온데간데 없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인격만 최하로 떨어졌고, 오히려 그 많은 욕을 타이핑 한 손가락을 생각하니 사람 자체가 한심스러웠다. 만약 그 편지를 그들의 자녀들이 본다해도 떳떳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한글로 저렇게 다양한 욕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울 따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고운 말이라면서 우리 2세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한글이, 자칫 어른들의 잘못된 사용으로 고귀한 의미를 잃을까 걱정된다. 또한, 구어체와 문어체를 구별할 줄 모르는 이들로 인해 한글의 품격이 달라질 수 있음도 인지해야 한다.


     한글 교육의 핵심은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한글은 우리 한인사회의 자부심이다. 한글은 영화 미나리, 기생충, 오징어게임 등으로 세계의 흐름을 타고 한류를 꽃피우고 있다. 인구 5천만의 작은 나라가 80억이 넘는 세계 인구를 사로잡기까지에는 한글이 있었다. 한글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 때, 한글발전을 위해 재외국민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내년 한글날에는 콜로라도 한인사회가 적극 나서서 주류사회와 함께 한글 창제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행사를 성대하게 치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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