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편지 / 한용구 목사
◈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복음 9장9절~13절
유럽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가 온다고 해서 팬들이 가득 모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회자가 나와서 죄송하다고, 비행이가 늦어져서 죄송하다고, 기다리는 동안 신인 가수 한 분의 노래를 들려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인 가수의 노래가 끝났지만 관중들은 냉냉하기만 했습니다. 누구 하나 박수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인 가수에게는 가혹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극장 입구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빠, 정말 최고였어요.”
신인 가수의 눈에 눈물이 고였고 청중들도 하나 둘씩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신인 가수가 20세기 최고의 테너라고 불리우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였어요. 성도 여러분, 많이도 필요 없어요. 한 사람만 있으면 돼요. 한 사람만!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내 마음을 읽어 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충분해요. 누군가가 내 마음을 읽어 주고 이해해 줄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마태는 세리였어요.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는 세리였어요. 그런데 세관에 앉아 있는 현장에서 예수님은 마태를 부르셨어요. 제자로 부르셨어요. 정말 이상한 것은 그 부르심을 듣고 세리는 세관의 자리를 단호하게 떨쳐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마태와 주님 사이에 어떤 감동이 오고 갔다는 겁니까? 분명히 뭔가 오고 간 겁니다. 그게 뭘까요? 말할 것도 없이 마태는 영적인 갈등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빨리 이 자리를 박차고 나서서 주님을 따라 가야 하는데, 회개하고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이 마음, 주님을 사모하는 이 마음을 주님은 읽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즉시 따라 나선 것이지요. 일평생 우리가 가져야할 영적인 마음이 바로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이 이 마음을 읽어 주시고 이해해 주시니까요. 예배를 사모하고 은혜를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은 주님과 통하는 마음이니까요.
삭개오도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의 마음은 주님의 마음과 직통했습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그 사모하는 마음을 당장 읽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지요.
“삭개오야, 내려 와라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
주님이 마음을 읽어 주셨으니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주님은 사모하는 마음을 읽어 주십니다. 사모하는 마음은 주님의 마음과 직통하는 마음입니다. 평생의 기도 제목입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은혜를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식지 않게 하소서.”
주님이 ‘나를 따르라 하시니 즉시 따르니라.’하는 말씀은 마태의 신앙이 순수하다는 뜻이지요. 여기 계산이나 따지는 게 없어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되나요? 그런 것도 없어요. 주님께 그 다음을 다 맡겼어요. 주님이 읽으신 마음이 바로 이 순수한 믿음이었던 것이지요. 은혜가 충만하면 따지지 않아요. 사랑하면 계산하지 않아요. 코로나 때문에 생긴 습관이‘오늘 예배드리러 갈까 말까?’하는 것이랍니다. 우리 그러지 맙시다. 주님은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셨는데, 우리도 무조건 주님을 의지할 것입니다. 따지거나 계산하지 말 것입니다. 또한 마태는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주님이 마태를 믿어 주셨습니다.
‘마태를 부르면 마태는 틀림없이 순종할거다.’
만약 마태를 보고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마태가 왜요? 내 자리를 정리하고 천천히요? 이유를 대고 핑계를 댔다면 주님의 체면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저는 늘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 주실까요? 우리교회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교회를 믿어 주실까요? 마태의 신앙은 주님이 믿어 주시는 신앙이었습니다. 그 신앙이 마태복음이라는 위대한 복음서를 기록하게 만든 것이지요. “주님, 일평생 사모하는 마음이 식지 않게 하소서. 마태처럼 순수한 믿음으로 늘 승리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님을 믿지만 주님이 우리를 믿어 주시는 아름다운 신앙이 되게 하소서.”
◈사람사는 이야기
▷참새와 가난한 아저씨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그림책이 있습니다. 제목 “부러진 부리”입니다.
어느 공원에 꼬마 참새 한 마리가 살았습니다. 공원에 떨어진 빵과 과자 부스러기를 먹고 살아가는 데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니까 부리가 부러졌어요. 그러니 무얼 쪼아 먹을 수가 없어요. 아무도 도와 주는 사람도 없어요. 동료 참새들은 오히려 왕따를 시키는 겁니다. 먹지 못해서 다리는 야위어 가고 몸은 더러워져갔어요. 그런데 이 불쌍한 꼬마 참새에게 실로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힘없이 벤취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의 손이 눈 앞에 나타났어요. 그 손엔 빵 조각이 들려져 있고 그 손으로 빵을 먹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부러진 부리를 만져 주면서요. 그건 노숙자의 거친 손이었습니다. 노숙자는 부러진 부리를 가진 꼬마 참새에게 빵을 먹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나와 처지가 같구나. 우리는 같은 처지야.”
꼬마 참새는 빵을 먹으면서 오랜만에 행복했습니다. 빵을 먹어서가 아닙니다. 사랑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녁 정말 오랜만에 노숙자 아저씨와 꼬마 참새는 그들만의 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꼬마 참새의 집입니다. 아저씨가 머리를 숙였습니다. 부시시한 아저씨의 머리에다 둥지를 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꼬마 참새는 아저씨의 머리 속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아저씨는 꼬마 참새를 쓰다듬으면서 말했습니다.
“잘 자, 참새야, 오랜만에 잘자.”
정말 오랜만에 꼬마 참새는 행복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짹”
그날 밤, 아저씨와 꼬마 참새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저씨는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꾸었고 꼬마 참새는 부리가 자라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렇게 그림책은 끝났습니다. 위로란 서로 같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 같아지면 사람을 살리는 법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우리와 같아지셨다는 표시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생긴 것이지요.
▷행복은 만원 짜리
가난한 남편이 만원 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아내의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요즘 지쳐 보인다며 뭐 맛있는 거라도 사 먹고 오라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대답을 했습니다.
“여보, 나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며칠 뒤 아내는 노인정에 다니는 시아버지에게 만원을 드렸습니다. 시아버지는 그날 노인정에서 며느리 자랑하느라 하루가 갔습니다. 그리고 명절날 손녀의 세배를 받고서 기분이 좋았던 시아버지는 숨겨둔 그 만원을 손녀에게 세뱃돈으로 주었습니다. 세뱃돈을 받아든 손녀는 상을 차리는 엄마에게 달려가 만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이 돈으로 맛 있는 거 사 드셔.”
그 순간 엄마는 요즘 들어 무척 힘들어 하는 남편이 떠올랐습니다. 아내는 조용히 일어나 남편의 호주머니에 쪽지와 함께 만원을 넣어둡니다. 만원 한 장은 가족 모두의 손을 거쳐서 결국 나왔던 남편의 주머니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만원 짜리 한 장이 가족 모두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