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의 골치아픈 사랑 이야기

 우리는 사랑이 늘 애절하고 진실하고 순수하기를 바란다. 현실에선 도대체 그러하지 않기 때문일까? 난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다. 로댕과 까미유와 로즈, 그들에게 사랑은 과연 얼마만큼 어디까지 순수하고 진실했을까? 로뎅 쪽에서 보면 늙고 교양없고 단순무식한 부인 로즈보다는 젊고 예쁘고 재능있는, 거기다가 예술적 영감까지 통하는 제자 까미유와의 사랑은 당연하지만, 자신의 모든걸 포기할 만큼 미련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 로댕은 이미 조각가로서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엄마처럼 보살펴 주던 누이가 약혼자의 외도의 충격으로 병들어 죽었던 가슴아픈 기억이 있는 로댕으로서 20여년을 함께 산 충견 같은 로즈를 버린 다는 것은 못 할짓이었을 것이다. 혹 로즈의 질투심 강한 시어머니 외아들 같은 현실적 보살핌이 순수한 젊은 사랑보다 더 필요했을지도 모르고.

 까미유 입장에서 본다면 그녀의 비범한 자아와 진실이 단지 로댕의 정부로서 평생을 살수는 도저히 없었을 것이고, 재봉사 출신의 로즈 쪽에서 보면 로댕은 결코 놓칠 수 없는 그녀의 전부였으리라. 계산해보면 까미유가 1살쯤이던  때부터 로즈는 로댕과 같이 살았으니 그 세월을 어찌하겠는가! 우유부단한 로댕은 둘 다 그대로 있어주오 이었지만 ? 로댕 정말 골치 아팠겠다 -, 질투심 강한 로즈는 죽어도 로댕은 내 것이고, 까미유는 로즈와 자기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로댕을 결코 참아낼 수 없었으리라. 까미유는 결국 로댕 곁을 떠나 (로댕을 통해 조각가로서 성공할 수도 있는 길이었지만) 자기 분열, 자기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

 셋 중에서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던 까미유는 사랑에 대한 자기 판단 오류로 자신을 파멸의 구덩이로 몰아갔다. 정신병원에서 나머지 30년을 완전히 미친 것도 아닌 오락가락한 상태로 생을 마쳤으니 말이다.
또한 로댕이 자신의 작업 아이디어를 훔쳐갔다고 생각한 까미유의 의식은 과연 진실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피해망상이었을까? 로댕은 말년에는 로즈에게 깊은 애정을 표현하였고, 52년을 같이 살다 1917년 2월과 12월에 각각 죽었으니, 최후의 승리자는 로즈, 결국 로즈의 압승이었다.  이 세 사람의 사랑은 박중훈이 나왔던 한국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을 생각나게 한다.

 위의 작품 “로뎅 흉상”은 까미유가 로댕과 열애를 시작하려던 시기인 1888년에 제작했으니까 실제의 로댕 그 이상으로 보았을 공산이 크다. 스승으로서 한창 잘 나가던 조각가로서 한없는 존경과 남자로서의 매력이 작품 곳곳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의 사랑은 증오로 변했어도 이 작품은 남아서 그 당시의 불꽃같은 사랑의 느낌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까미유 자신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중년”이라는 작품은, 애원하는 젊은 여자(까미유)에게 등을 돌리며 늙은 여자(로즈)의 죽음 같은 강한 힘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남자(로댕)의 힘없는 모습으로 그녀의 안타까운 사랑이 너무나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런 절망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한편의 시처럼 아름다운 것은 까미유의 로댕에 대한 사랑이 순수했기 때문이 아닐까? 순수한 사랑을 믿는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이여!  한때의 사랑의 감성과 순수함에 속지마라. 사랑은 사랑하는 그 당시만이 순수하고 영원하게 느껴질 뿐, 지나고 나면 먼지같은 현실과 포장된 추억만이 남을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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