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사춘기 때, 원칙을 지키지 않는 리더 때문에 굉장히 분노한 적이 있었다. 공감을 얻기 위해 지도 선생님께 이 일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선생님은 공감해 주는 대신 세상을 흑백논리로만 보지 말고 중요한 게 무엇인가 항상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셨다.  20대에 접어들어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때 보게 된 흑백영화 한 편은 나에게 하나의 지침을 주었다. 제목도, 주연배우도 기억이 나지 않는 미국 영화였는데 “방법은 타협될 수 있지만 진리는 타협될 수 없다”는 주인공의 대사가 지금도 마음 한 켠에 새겨져 있다.  살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이 두 가지는 살면서 많은 도움이 된다.  어떤 일로 아이를 닦달할 때도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화내지 않고 강요하지 않았어도 되는 일이었는지 자문하게 된다.

 남편과 나는 주말이면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특히 요즘 관심이 많이 가는 프로그램은 ‘나는 가수다’이다. 시청률이 저조했던 MBC ‘일밤’에 실력파 가수 7명을 내세워 서바이벌 형식으로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방송 시작부터 우리의 흥미를 끌었다.  가요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평일 늦은 밤시간으로 밀려난지 오래인데 황금시간대인 일요일 저녁, 실력있는 가수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의 기대감 또한 우리만큼 컸던 것 같다.  지난 20일 3회가 방송되었다. 그런데 남편이 “방송 후 사람들이 엄청나게 욕하고 있다”고 해서 그 날은 남편과 더 관심있게 보게 되었다.

 이날 청중평가단 500명의 투표로 7인의 가수 중 한 명이 탈락하고 그 자리에 다른 가수가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7위로 뽑힌 사람이 김건모였고, 동료 가수들과 매니저들이 충격에 휩싸여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것을 요구했다. 제작진은 회의를 통해 김건모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고 고심 끝에 김건모가 재도전을 하겠다고 하면서 방송은 끝이났다. 방송 후 하루가 되지 않아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방송 이틀만에 인터넷 포털 아고라에 제작진의 사과를 요구하는 청원 서명이 6천개가 넘었다.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낸 가수 이소라에 대한 자질시비와 이를 방송에 내보낸 제작진의 편집을 질타하는 의견, 재도전이 결정된 순간 화면에 비쳐진 한 가수의 표정에 대한 해명기사 등 기사가 넘쳐났다. 방송 삼 일 만에 담당 PD는 기자회견을 갖고 공식적 사과와 사퇴의사를 표명했고, MBC는 바로 다음날 담당PD를 교체했다. 기사가 나가자 네티즌들 사이에서  ‘교체는 심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고 가수들 중 일부 하차설도 나오고 있다.

 이 사건의 중심에서 거론되는 것은 ‘원칙’이다. 시청자들은 7위가 하차하기로 한 ‘원칙’을 어겼다며 항의했고, 담당PD도 ‘원칙’을 깬 것에 대해 사과하고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MBC 또한 ‘원칙’을 깨고 시청자들과의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에 담당자 경질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방송 3~4일 안에 이루어진 이 모든 일을 보면서 새삼 한국의 인터넷 속도에 놀라게 되고, 비판부터 하고 보는 여론과 빠른 결정으로 질타를 모면하는 방송국의 태도에 씁쓸한 생각이 든다. 

  물론 원칙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나 원칙을 지키지 않는 개인은 신뢰성을 잃게 되고 질타도 피해갈 수 없다.  원칙에는 융통성이 통하지 않고, 융통성을 발휘하다 보면 원칙은 의미를 잃게 되고 질서도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원칙을 하나의 약속으로 본다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 사과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이 원칙이 무엇을 위해 존재했던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3회에서 담당PD는 재도전이 결정되기까지의 과정을 여과없이 보여주었다. 왜 이런 결정이 내려졌는지 시청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결정이 내려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원칙은 냉정하다. 원칙은 패자를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상처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처난 사람들에게 일회용 밴드를 붙여주었고 시청자들은 일회용 밴드가 원칙을 무시한 것이라고 화를 냈다. 상처입게 될 사람을 위해 마련한 자구책이 무시무시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여론을 수렴했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된 게 아니다. 여전히 모두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이제 이런 상황들이 어떻게 수습될지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원칙과 원칙에 따른 소신, 원칙을 넘어서는 소신도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건설적인 비판은 하되, 조금 더 기다려줄 줄 아는 네티즌들의 여유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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