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 인천공항이나 부두에서 보면 동남아시아 근로자들이 큰 이민가방을 몇 개씩 들고 나가는걸 흔히 볼 수 있는데, 그게 다 전기밥솥, 텔레비젼, 스마트폰, 전부 그런거랍니다. 그들에게는 그게 최고로 귀하다는 것이지요. 그 소원하던거 샀다는 기쁨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사실 30여년전만해도 우리나라에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운좋게 살아서 돌아오는 김 상사도 베트콩하고 생명바쳐 싸운 피 값으로 미제 TV 하나와 일제 케넌 카메라하나 사가지고 오면 최고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지요. 왜 우습습니까? 그 모든 것들은 <절대적 가치>가 아닌 <상대적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게 나오면 금방 시시해지기 때문이지요.

 무엇이 정말 귀할까? 그런 상대적이 아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절대적 가치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이 우리 인생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 사람을 양이라고 말씀합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절대적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양은 목자없으면 시체입니다. 시력이 약해서 푸른 초장도 못 찾아가고, 마음이 너무 심약해서 조그만 물가에도 못 들어가고, 방어기제인 뿔이나 날카로운 발톱이 없으니 조그만 여우에게도 꼼짝 못하고 잡아먹힙니다. 여리고 약하고 미련하고 도대체 한 순간도 스스로는 살 수 없는 존재! 그것이 우리 인간의 <창조적 실존>입니다. 삶속에서 조금이라도 실패해보고, 조금이라도 누워본 분들은 절감하겠지만, 인간은 그렇게 강하고 힘있고 똑똑한 존재가 아닙니다. 내일 일을 알 수 있습니까? 밤새 안녕! 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자신에게 조금 관대하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위대한 사람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23편) 다윗에게 그 목자가 있었기에 그가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이지요. 우리 이민자의 아들 이름을 흔히 다윗이라고 짓는데, 다윗이라고 짓는다고 다윗이 되는 것 아닙니다. 그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세 친구가 있다고 하지요. 죽음까지 가는 친구, 무덤까지 가는 친구, 그리고 무덤 건너편까지 가는 친구. 죽음까지 가는 친구는 물질, 권세, 명예입니다. 아무리 많아도 거기까지 밖에 못갑니다. 부모형제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도 아무리 사랑하지만 무덤까지 밖에 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관을 붙들고 몸부림쳐봐도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덤 건너편, 영원한 하늘나라까지 동행해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영원한 친구! 영원히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분! 천국까지 인도하여 주시는 영원한 목자! 그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독자 여러분! 잠시 후 우리 모두는 다 그 길을 가야합니다. 무엇이 가장 귀합니까? 몸살하나라도 나 보십시오. 몸살이란, 내 몸이 ‘살려주세요’ 하는게 몸살입니다. 그 몸살 하나만 나도 그 큰 TV가 귀합니까? 렉서스 차가 귀합니까? 그 큰 집? 5천불짜리 침대? 스마트폰, 그것이 나를 구원해줍니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귀합니다. 그 한분이 가장 귀합니다. 짝퉁인 <상대적 가치>만 사랑하고 살다가 진짜 놓치지 마시고, 진짜인 <절대적 가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사십시요. 목적을 이루는 삶보다는 의미있는 삶이 되십시오. 

 몇년 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영사관에서 직원들이 이 덴버에 파견되어 일일민원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전자여권으로 갱신하는 민원은 밀리고 직원들이 비행기타고 돌아갈 시간은 촉박하고 마감 할 시간이 닥치자 교민들이 거의 질서없이 밀려들었습니다. 그때 함께 오래 기다리던 한 분이 매우 분노하면서 거칠게 화를 토해내고 있기에, 제가 동포애를 가지고 그 분께 말을 걸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맹준호목사입니다...’ 그순간 그분은 제가 뒷말 할 틈도 주지않고 싸늘하게 이렇게 내 뱉었습니다. ‘나는 그런거하고 상관없소!’ 사실 저는 그 뒤에 ‘속상하시지요?’ 하면서 위로라도 하고 싶은 마음으로 다가갔는데, 그분은 제가 전도라도 하려는줄 알았던 모양인지, 아니면 평소에 예수믿는 성도나 교회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던 게지요. 너무 머쓱해진 저는 더 이상 아무말도 못하고 뒤돌아섰지만, 속으로 이런 생각이 불쑥 올라오더군요. ‘상관없다? 그렇게 상관없이 살다가 잠시 후 하나님께 돌아갔을 때 그때 주님도 “나도 너와 상관없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일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그 ‘상관없소’라는 말이 굉장히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정말 우리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을 수 있을까요? 상관없다면 어떤 인생이 될까요? 지금도 때때로 그 말이 생각날 때마다 그분이 제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있는 분이 되기를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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