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삶의 전영역에서 일어나는 컴퓨터로 인한 전 세계적인 혁명적 변화는 바로 0과 1이라는 두 숫자의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IT산업의 근간이 되는 이진법(0, 1)이란 0와 1의 두 가지 숫자만 사용하는 수학 의 표현 기법 중 하나로 놀랍도록 새로운 삶의 형태를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핵심되는 십자가의 복음 역시 0과 1 이라는 두 숫자로 이해될 수 있는 내용상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진리 체계 전체를 담을 수 있는 하나의 단어를 들자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단어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도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한 것이고, 천국도 지상에서 미리 앞당겨 맛보는 것이든, 부활 후의 것이든 하나님과 함께 함에 그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인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예배와 삶의 균형 잡힌 진행이요 결국 교리적 고백의 차원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삶이라는 현실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고백은 신앙공동체의 모든 구성원 각자에게서 일어나는 하나님과의 연합이 합해지고 모아져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함에도 그 연합의 모습은 일정한 형식이 있습니다. 한 남자가 편하게 가족과 함께 할 때와 회사의 최고 상급자와 함께 할 때는 마음 가짐도 태도도 같을 수가 없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전지 전능하시며 천지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미물 같은 나를 십자가 사건을 통해 계시된 모습으로 무한히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내가 연합한 상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기호가 바로 (0, 1) 인 것입니다. 괄호로 묶여 하나님과 마치 하나의 세트인 것처럼, 삶의 파트너처럼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묶여야 합니다. 이 묶임이 실제의 일상에서 현실이 될 수 있는 유일하고 적합한 형태가 바로 인간인 나는 제로(0) 가 되고, 하나님은 전부 (1) 로서 자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원 스위치로 비유하면 나는 꺼지고( off ) 내안에서 하나님이 켜지는( on )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엄마 노릇을 한다고 할 때 이 연합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엄마 노릇을 위한 나의 능력, 나의 지혜, 나의 경험, 나의 사랑의 스위치를 꺼서( off ) 제로( 0 )로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엄마인 내 안에서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과 사랑의 스위치를 켜시고( on ) 우리안에서 전부( 1 )가 되셔서 자녀를 향해 하나님이 직접 활동하시게 되는 상태가 현실이 됩니다. 바로 이 모습이 하나님과 연합된 실제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 간단한 예를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사는 life style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기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매사에 이처럼 제로(0)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 고백을 통해 바로 제로(0)가 되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 모든 영역에서 나 자신이 이천년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고백이란 여러 모양의 내가 있을 수 있는 중에 오로지 십자가에서 죽은 나를 선택하여 그 죽은 나를 참된 나로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며, 팔삭둥이며,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못할 자로다”라고 외치는 바울의 외침에서 그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때 우리는 이처럼 제로( 0 ) 됨에 있어서 발생할 수 있는 오해를 조심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제로(0)가 된다는 것을 당면한 일이나 문제, 아니면 대인 관계 혹은 꿈과 비전 등을 내 맡기거나, 내려 놓거나, 포기하거나, 아니면 그것들에 대한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표현들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아직 내가 주체가 되어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 자신이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입으로, 마음으로 시인 하고 인정함으로, 그 대상들을 어떤 식이든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내 마음이 그것들에 대해 죽는 것, 전혀 무관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기한 것은 이때 우리는 이 고백을 통해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라고한 바울의 고백을 우리도 나의 것으로 고백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붙잡고 죽음을 뜻하는 제로(0)가 됨을 고백하는 모든 순간에, 전부(1)가 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영이 내 안에 임재하십니다. 이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소유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바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업과 소유의 전부인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때,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이전 우리의 일로 착각했던 삶의 모든 일은 본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회수하십니다.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우리 안에서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를 따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일로서 수행해 나가십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는 고백을 통해 바울이 뜻하는 바는 날마다 십자가를 붙잡고 내가 없음(0)이 되어 자기 생애의 하루 하루를 전부(1)가 되시는 하나님의 활동 무대로 내어 드리고 있다는 표현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삶의 스타일인 (0, 1)은 임마누엘의 현대적인 표현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0, 1)은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과 영역을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활동의 라이브 무대(Live Stage)가 되게 합니다. 복음의 Life Style(0, 1) 주창은 기계분야, 정보산업분야, 과학분야 등에만 국한된 디지털(0,1) 원리를 인격적 차원에 적용하려는 선교적 노력이며, 이 시대에 복음의 영원한 유효성을 밝히 드러내려는 하나의 변증입니다.

<덴버 중앙교회 강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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