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들이 비일비지하다. 그 옛날에는 귀찮게만 들렸던 어르신들의 말씀이 이제는 새록새록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그 깨달음으로 가슴이 짜안해지기도한다. 어린시절 한때 편지글을 쓸때나 일기를 쓸때면, 그리고 무심코 낙서를 할때면 인용했던 그런 말들은 이제 너무 진부해서 자라나는 자녀들한테 조차도 해줄 수 없는 말들이 된것도 꽤 있다. 살아온 삶의 깊이가 초가집 처마밑에 빗방울이 떨어져 옴폭 손바닥만하게 고여있는 물만큼도 깊지 못하여 뜻을 알래야 알수도 없으면서 아는것 처럼 읇고 다녔던 싯구들의 뜻을 이제야 쓰라린 가슴으로 깨달으면서 푸석푸석하게 스러지는 어린시절을 뒤돌아보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얼마전에 오랫만에 만난분이 나에게 그처럼 진부했던 이제는 더이상 써먹을 수도 없게된 말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이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라는 말이었다. 내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오래전부터 거의 20여년을 프리랜서로 여러가지 일을 해오면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은 것이 있다면 바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업무를 통하여 얻은 정보에 대한 철저한 함구였다. 그것이 반복되다보니 아예 그러한 정보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 이제는 너무 기억을 못해서 민망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옛날에 내가 무엇을 그분한테 해드렸는지 전혀 기억을 할 수는 없었다. 그냥 옛날부터 일을 도와드렸던 분으로만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 말씀에 따르면 미국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나를 만났고, 이민국 업무와 관련해서 요구되는 서류가 여러가지 있었는데 어떻게 만들어야할지 막막한 상태였다고 했다. 그런데 나를 만났을때 내가 아무것도 없이 와서 그분의 컴퓨터에 앉아서 여러가지 서류를 바로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대단히 감동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같으면 이력서니 기타 제반 서류가 정해진 양식이 있으니까 그대로 사용하지만, 미국에서는 그처럼 정해진 양식도 없고 어찌해야할지를 몰라서 아주 막막했던 상황이었다고 했다.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와서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막막했던 서류를 만들어내는 것이 놀라웠다는 말을 듣고 그것이 바로 그 진부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라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살면서 나는 한국에서 영어를 완전히 익혀왔던 덕을 현재까지 충분히 보면서 살고있다. 내가 영어를 그렇게 못했다면 진부하기는 하지만 그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도움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 확실하다. 알고보면 간단하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이지만 영어라는 걸림돌이 있으면 그렇게 쉽고 간단한 것들도 커다란 짐이되고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몇 년 전에 어떤분은 임대계약의 옵션권리행사를 위하여 건물주인에게 편지를 써야하는데 어떻게 써야할지를 모른다는 부탁을 받고 도와준적이 있다. 그분은 입으로 하는 영어는 유창하지 못해도 읽고 쓰는 영어는 상당히 잘하는 분이었다. 몇 줄 되지 않는 간단한 편지를 써서 건네주자 한 눈에 알아보고는 ‘이렇게 간단한건 나도할 수 있다’라고 놀라움으로 말했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지를 몰라서 그렇지 한번 샘플을 보고나면 바로 따라할 수 있는 정도의 영어실력이 충분했던 분이다. 그분이 영어를 말하는 실력도 영어를 읽는 실력과 같이 탄탄하여 간단한 서류들을 한 번 보면 다음번부터는 바로 해낼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로하는 것도 한 번 들으면 다음번부터는 혼자서 그대로 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입에서 유창한 영어가 나오도록 제대로 배워야하는 절대적인 이유를 하나하나 세세히 따지자면 수십가지 수백가지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이유를 하나의 표현으로 묶어내자면 진부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하여라고 할 수 있다. 영어가 유창해지면 지금은 당장 할 수 없는 오만가지의 일들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자동차 고치는 기술을 익히면 지금은 내손으로 고칠 수 없는 것들을 마음만 먹으면 직접해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영어가 유창해지면 어디든지 빈손(?)으로 가서 지금은 해낼 수 없는 일들을 어렵지 않게 마무리하고 돌아올 수 있다. 영어때문에 지금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영어를 제대로 배워서 앞으로 평생동안 불편하지 않게 내 권리를 지키고, 볼일을 볼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고, 가르칠 수 있게된다면, 영어야 말로 힘껏 매달려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유창한 영어를 손아귀에 움켜잡는다는 것은 항상 힘들고, 버겁고, 불안한 영어의 그늘에서 화사하고 시원한 미풍이 있는 영어의 양지로 자리바꿈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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