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지역이 미국만큼 넓지도 않고 인구 또한 많지도 않다. 그 만큼 좁으니 작은 숫자로도 얼마든지 국민을 위한 일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다. 지금이야 컴퓨터 시대이고 인터넷으로 세계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시대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숫자가 비슷하다면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게 있다는 것이 틀림없다. 지역구니 광역구니 제 밥그릇 지키기 위해 만들어 놓았을 그 숫자부터 확 줄였으면 좋겠다. 역사적으로도 그랬다. 무슨 일이든 서로 반대만 일삼고 파당을 만들어 국론을 반 토막 내는 일을 다반사로 해냈던 전력이 있다. 지금처럼 의견이 분분하고 또 그 여론을 수렴하기 좋아서 아예 넘쳐나는 마당에 그 많은 의사가 왜 또 더 필요한가? 서로 욕하고 싸우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5년의 제한된 기회가 왜 있어야 하고 국민 투표는 왜 했는가?
숫자가 확 줄어들면 국회가 마비 될 것 같은가? 허구한날 반대만 해 보이기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들이라면 스스로 그 숫자를 줄일 줄도 모를 것이다. 광우병 횃불 시위가 아니라 국회의원 숫자를 줄이자는 시민 운동이 더 필요했다. 먼저 그 필요성을 국회의원이 아닌 쪽에다 알아보면 된다. 일반 기업에서도 엄청난 숫자의 일자리가 줄어 들었다. 물론 과거 같지 않은 세상의 바뀜 때문이다. 보다 효율적으로 세상의 바뀐 문명의 이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면 똑같이 그 숫자도 줄어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 꼬리나 잡아서 장관을 마구 낙마시키고 아주 졸렬한 언변으로 인기영합에나 골몰하는 이들이라면 왜 세비까지 줘가며 매일같이 그 추태를 지켜 봐줘야 하는가? 아무리 많아 봤자 그 파벌에 묻혀 자기의견을 개진하지 못한다면 그 파벌만큼만의 의견이나 숫자로도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더 이상의 도발에 대한 대응책’을 묻는 자리에 나온 방송패널들의 면모가 꼭 그랬다. 과거 400여 년 전 임전왜란을 앞둔 때에도 서로 파벌 싸움하느라 전쟁에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던 것처럼 아주 드러나게 서로의 의견을 달리 보여준다. 포탄을 퍼붓는 도발을 두고도 햇볕 정책 운운하는 인사의 면면을 보자 부아가 치밀었다.
5,000년 역사 동안 힘이 약해서 순전히 침략만 받아왔던 과거를 전혀 모른체하는 그 철면피가 미웠다. 도발이나 침략이 왜 생기는 것인지도 모르고 교수를 한다면 무엇을 가르치는 선생인가? 입영을 거부하는 ***의 증인 신자가 장정으로 군에 입대할 때의 일이다. 입대를 거부하면 바로 남한산성(군 영창)행이었다. ‘넌 왜 입영을 거부 하느냐’고 물으니까 답이 그랬다. “세상의 모든 이가 다 ***의 증인이라면 전쟁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 죽이는 총을 들어야 하는 군대에 입영하느니 세상의 모든 이가 ***의 증인이 될 때까지 기도하는 일을 택하는 것이다.” 얼마나 착하고 순진한 대답이고 철학인가? 전쟁의 거의 전부가 종교 전쟁이었으니 그에서 나온 말이었다면 참으로 참담한 대답이다. 이만한 순진함으로 무장한다면 이 장정처럼 영어(囹圄)생활이 확실할 것이고, 대화와 화해만으로 전쟁을 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태껏 인류 역사이래 전쟁으로 죽은 자들을 일일이 헤아려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엔 국회의원도 한 분 계셨는데 그 만한 수준의 좌담을 보고 있자니 절로 국회의원 숫자 또한 확 줄여도 될 것이란 확신이 들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