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는 제법 눈이 쌓인 것 같은데, 우리가 사는 동네에는 눈이 오지 않아 좋기는 하면서도 눈 고장의 겨울 초입이 웬지 삭막한 느낌이였는데, 요즘 몇일 눈이 오락가락하며 비로소 겨울의 정취가 납니다. 추수감사절기를 확인하기 위해 문득 달력을 보니 어느듯 한해가 묵은해로 거의 다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참 빠른 인생, 어떻게 마무리 해야 할까?’ 해마다 이맘때면 그렇듯이 또 세월에 대한 긴장감이 혓바늘처럼 아픔으로 솟아올라옵니다.

흩날리는 눈발의 아늑감에 파묻혀 ‘그 청년 바보의사’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안수현>이라는 착한 청년의 짧은 일생을 그를 아까워하는 분들이 정리한 책으로, 이 청년은 우리나라 고대의대를 나와 안암병원에서 근무하다가 군의관 대위로 병역의무를 마쳐가던 어느날, 군 훈련이 늘 그렇듯이 사병들의 사격훈련지원차 앰브런스를 타고 갔다가 사병들과 함께 담소하며 들밭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하던 중, 유행성출혈열(들쥐가 옮기는 세균성 질환으로 혈관이 파열되는 병)에 걸려 2006년 1월5일 밤 33살의 그 좋은 나이에 너무 어이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로님과 권사님인 부모님을 따라 어릴 때부터 예수를 잘 믿던 착하고 성실하기만한 막내아들입니다. 의대입학시험을 앞두고도, 의사고시를 앞두고도, ‘하나님께 드리는 주일만큼은 조금도 헛되이 쓸 수 없다’하여 한주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가 주일학교 교사로, 성가대로, 청년부 인도자로, 지치도록 주님을 섬기던 청년입니다. 그 덕에 일년 재수도 하고, 의대에서 한번 유급도 당했지만,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주님 없이는 의미없다’하며 기도와 섬김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안암병원에 근무할 때 하루종일 회진하고도 남들이 다 잠든 틈에 모든 환자의 병상을 조용히 찾아다니며 일일이 머리에 손얹고 기도해주고, 성경이 필요한 분은 성경을 사다주고, 찬송이 듣고 싶다하면 일일이 찬송CD를 사다주고, 퇴원한 환자들에게도 꼭 전화해서 회복을 확인하고, 때로는 찾아가기도 하면서 그렇게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게로 오신 주님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필요를 가슴으로 담아주던 청년입니다. 전국의 의사들이 파업할 때도 ‘의사는 환자곁에 있어야 한다’며 홀로 환자를 지키다가 그 조직사회에서 많은 불익을 당해도 그의 태도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청년이 어쩌면 그렇게 예수님과 똑같은 나이 33살에 세상을 떠날 때, 온 병원이 울고, 모든 환자가 울고, 모든 동료들이 울었습니다. 저도 이 책을 덮으며 ‘주님, 어떻게 이런 청년을 그렇게 데려가십니까?’ 너무 아깝고 안타까운 마음에 한동안 깊은 상념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댓글을 남겼더군요. ‘죽은 이후에 자신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젊은 의사는 조금 일찍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우리 중 누구도 다다르지 못한 성취를 이룬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시골의사 박경철) ‘사람은 삶의 길이로 말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업적도 가슴을 움직이는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수현 형제는 삶 자체로 감동을 남겼습니다’(예수병원장 김민철) ‘살아있을 때 사람들에게 빛이 되었던 수현이는 이제 스티그마(흔적)로 남아 그의 이야기를 접하는 이들에게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높은뜻 숭의교회 담임목사 김동호) ‘무의미한 경쟁속을 달리다가 안수현 청년을 생각하면 발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삶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준 청년에게 감사를 전합니다’(변호사 박지영)

2003년 4월22일, <김대중대통령>은 신임 <노무현대통령>과 청와대만찬장에서 건강을 묻는 노대통령에게 충격적이리만큼 노쇠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임 5년동안 건강을 깎아먹고 살았어요..’ 곱씹어볼수록 “건강(생명)을 깎아먹었다”는 故 <김대중 대통령>의 이 말은 인생에 대한 참 적절한 묘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모든 인간은, 실은 시시각각 자기 생명을 깎아먹고 살아가는 존재이지요.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다 깎아먹고 더 이상 깎아 먹을 것이 없는 상태,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은 예외없이 동일합니다. 단, 차이가 있다면 무엇을 위해 이 생명을 깎아 먹었는가? 다시 말하면 자기 생명을 다 깎아먹은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일 것입니다.

독자여러분! 한해를 또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요? 우리 일생은 또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전문 바둑기사에 대해 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대국이 끝난 뒤 어떻게 그렇게 단 한수의 착오도 없이 복기(復碁) 할 수 있냐?는 것이지요. 한 바둑대가를 만났을 때 그 해답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의미있는 돌들을 놓으면 누구든 복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왜 바둑알을 그곳에 두는지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두면, 복기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의미있는 돌 들은 살아남는다!> 이것은 바둑판에만 국한된 법칙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결국 한판의 바둑이요, 우리가 사는 매일매일은 그 바둑판위에 두는 돌과 같기에, 얼마나 살았느냐에 상관없이 결국엔 의미를 지닌 돌들만 남게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청년 <안수현>을 생각하며 나도 올 한해의 끝 녘에, 인생의 <의미있는 마무리 돌> 하나를 던져야겠다고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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