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역을 할 때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세 차례 다녀올 수 있었다. 나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 삶을 나누셨던 모든 장소를 돌아보면서 큰 은혜를 받았었다.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 두 개가 있다. 가톨릭과 정교회 등 구교가 관리하고 있는 성 분묘교회와, 성공회를 비롯해서 개신교회가 믿고 있는 예루살렘 성벽 밖에 있는 정원 무덤이다. 성 분묘교회는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어서 옛 무덤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으나 정원 무덤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고대 유대인의 무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두 무덤 중에 어떤 것이 예수님의 진짜 무덤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두 무덤이 다 비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의 성취이며,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죽음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삶을 지배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두려움과 공포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을 만들었고,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종교를 만들었으며, 죽음을 승화시키기 위해서 예술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지혜가 아니다. 그것들은 일시적인 위로와 기쁨을 줄 수는 있으나 결국 더 큰 허무와 절망을 가져오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기 전에는 진정한 평안을 가질 수가 없다.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의 신비학>에서 “죽음은 신비로운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아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 진실을 알지 못할 때에 인간은 허무한 꿈을 갖게 된다. 기원전 3세기에 중국을 통일했던 진시황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죽지 않고 영생하기 위해서 서복에게 3000명의 동남동녀를 주며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했다. 문헌에 의하면 서복은 제주도를 방문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나라를 세우고, 진시황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 후 진시황은 또 다른 불로초를 구하였으나 50세에 죽고 말았다. 어쩌면 현대인들이 구하고 있는 불로초는 생명공학일 것이다. 그들은 줄기세포를 배양해서 인간의 상처받은 조직을 치유하고, 죽어가는 세포들을 새로운 세포로 교체하여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며 늙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피하고 싶은 죽음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정해 놓으신 이치이다(히9:27). 그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존재한다. 성경은 그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첫째, 육체적인 죽음이다. 이 죽음은 죄를 범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로 표현되었다(롬5:12). 삶은 죽음을 향한 과정이며 모든 삶에는 항상 죽음이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은 존재의 종말이 아니라 영혼과 결합되어 있던 육체가 분리되는 것이며, 참 생명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희망의 관문이다.  둘째, 영적인 죽음이다. 영적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2:5)고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이다.  셋째, 영원한 죽음이다(계20:14). 이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죽음에는 부활체와 영혼의 고통이 영원히 동반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원한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경건한 자들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신다고 했다(시116:15). 예수님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고 말씀하셨다.

     이탈리아의 한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의사의 증언이 있다. “9일전에 75세 된 목회자 한 분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호흡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죽어 가는 환자들의 손을 붙잡고 그 성경을 그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우리 의사들은 모두 지쳤고, 낙심했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끝장이 나 있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있을 때 그 목회자 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목회자분이 자신의 상태와 우리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평안은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평안이었습니다. (중략) 어제 그 75세 된 목회자분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 목회자 분은 주님께로 갔습니다” 그 목회자가 극심한 고통 중에도 평안을 유지하며 다른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믿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과거에도 역병이 있었음을 말씀하고 있다. 그때마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죄를 회개하며 용서와 치유를 구했다. 우리는 COVID19으로 인해 깨어지고 있는 인간관계, 한계에 달한 현대의학, 그리고 참담한 경제 공황을 바라보면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것이 없는지 돌이켜 봐야 한다.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는 결코 포기가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렘29:11). 그리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히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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