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히드로 공항에 내렸을 때 거의 자정이 다 되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거리도 으슥해져 다운타운까지 가는 전철을 타러 가는 길도 무서웠다.  가까스레 전철을 타고 호텔 근처에서 내렸는데, 한 정거장을 미리 내렸는지 출구에서 나와 한참을 걸었는데도 호텔 사인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웬 남자가 다가와 어디를 가냐고 물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안개 자욱한 거리에, 벙거지 모자를 쓰고 나타난 이 남자가 결코 영국신사처럼 보일 리 만무했다.  내가 대꾸를 하지 않아도, 그는 뒤따라오며 주변 상점들을 소개해 주는 오지랖을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따라오던 남자는 필자가 말 한마디도 하지 않자, 갑자기 본인이 착한 사람이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럴수록 그가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그리고 그 아저씨는 집요하게 필자의 종착지를 물어봤고, 거기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겠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짜증섞인 어투로 간섭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선 필자는 배낭 어깨끈을 더 세게 부여잡고 앞만 보고 바삐 걸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그 아저씨는 호텔 매니저를 향해 본인이 여기까지 필자를 에스코트 한 것이라며 자랑삼듯 큰 소리로 말하고 떠났다. 참으로 어이없는 사람이 아닌가. 본인은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받는 사람이 이를 극도로 원하지 않고 불편하게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주제넘은 짓이다.

      ‘주제넘다’라는 표현은 말이나 행동이 건방져 분수에 지나친 데가 있다는 말이다. 즉 자신의 본분을 잊고 너무 나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국의 그 아저씨 이후로 이렇게 일방적으로 주제 넘는 일을 일삼는 사람을 여럿 본 적이 있는데, 요즘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그러해 보인다. 정치, 경제, 사회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대북문제만큼은 확실히 주제 넘는 일을 하고 있어 보인다.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이 하는 말을 두고 반감을 표현할 때, 서두에 반드시 ‘남조선 혹은 남측’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남한 전체의 국민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정은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면, 마치 대한민국 국민 전체에게 퍼붓는 막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듣기 거북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지난주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청와대 안보실장이 ‘트럼프 대통령이 부탁한 김정은 생일 축하 메시지를 북측에 전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북한 김계관 외무성 고문은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낸 생일 축하 메세지는 친서로 직접 받았다”면서 한국 정부를 향해 “주제넘게 끼어들지 말라”고 했다. 또, "남조선이 흥분에 겨워 온몸을 떨며 긴급통지문으로 알린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미·북 연락 통로는 따로 있으니 남조선은 본전도 못 챙기는 바보 신세가 되지 않으려거든 자중하라"고 공개적으로 퍼부었다. 그리고는 국가의 수뇌들 사이에 친분관계를 맺는 것은 외교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남조선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사이의 친분관계에 중뿔나게 끼어드는 것도 주제넘은 일이라며 저돌적으로 비난했다. 문재인 정부는 '트럼프 메시지'로 미·북 간 중재자 역할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려다 북으로부터 모욕과 조롱만 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지금까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작년 신년사에서는 '북남관계' 에 대해 10번이나 언급했던 김정은은 올해 신년사에는 대남 정책을 비롯해 한국에 대한 언급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김정은 답방과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자, 북은 곧바로 ‘대북정책 광고놀음, 아전인수격 자화자찬, 과대망상, 헛나발, 역겹기 그지없다’ 등의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며 문 대통령의 발언을 깎아내렸다. 지난해 6월에는 문 대통령이 "남북 대화가 다양한 경로로 이뤄지고 있다"고 발표하자, 북한 외무성 국장은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고 바로 반박했다. 지난해 8월, 한국 정부가 북한에 쌀 5만 톤을 보내기로 했을 때였다. 북한은 "시시껄렁한 물물 거래, 생색 내기"라고 퇴짜를 놓았다. 비슷한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문 대통령이 "남북 경협으로 단숨에 일본을 따라잡겠다"고 말했지만 북한은 다음 날 바로 "맞을 짓 하지 말라"며 미사일을 쐈다. 지난해 9월, 김정은은 백령도 남동쪽에 위치한 창린도 방어부대를 찾아 해안포 사격을 지시했다. 이는 아세안 정상회의가 열렸던 시기와 맞물려, 아시아 정상 다 모인 자리에서 문 대통령에게 작정하고 모욕 주려는 의도로도 풀이된다. 대한민국을 향해 대놓고 모독을 일삼는 북한이다. 너무 자주 듣는 모독적인 발언때문에 북한이 뉴스에만 나오면 지레 낯이 뜨거워진다. 

       현실을 직시하자면, 당사자인 북한이 한국에게 “제발 나대지 말라”고 애걸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북한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역겹다고까지 한다. 한 국가를 향해 이 정도의 저급한 말을 쏟아부을 때에는, 정말 싫은 것이다. 오히려 지금처럼 북한이 싫어하는 간섭과 언급을 이어간다면 남북관계가 더 악화될 수도 있다. 적어도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자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지난해 하노이 정상회담 불발 이후, 미국에게 한국은 보증을 잘못 선 죄로 신용을 잃었고, 북에게 한국은 미국과 쓸모없는 다리를 놔 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 정부가 대북정책에서 무슨 성과라도 있었던 것처럼 계속 과대포장한다면, 듣는 이들도 민망하다. 북한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제재 완화와 핵을 바꾸지 않겠다고 천명한 상태이다. 더이상 주제넘은 오지랖은 부리지 말아야 한다. 4월 총선 기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곳 콜로라도에도 투표권을 가진 이들이 많다. 경쟁 당에 책잡히는 일은 더이상 삼가는 것이 좋다. 지금이라도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고 실질적인 북한 비핵화를 위해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강화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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