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때 복의 시작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연약함을 깨달을 때 겸손해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사람이 겸손해 지면 복이 시작됩니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보면 배가 금이 가기 시작하니까 쥐들이 다 기어 나옵니다. 쥐는 벌써 파선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개미는 홍수가 날 것을 미리 알고 집을 나무꼭대기로 옮긴다고 합니다. 거미는 바람이 불기 전에 어디서 바람이 불어올 것인지 바람 부는 방향을 알고 거미줄을 친다고 합니다. 한 마리 미물만도 못한 게 우리 인생이라는 사실입니다. 내일을 모릅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육체적으로도 연약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병균하나에 평생 병원신세를 지지 않았던 건장한 청년이 쓰러집니다. 정신적으로도 얼마나 연약합니까? 누군가의 눈짓 한 번으로 마음이 무너지고 작은 걱정 때문에 밤잠을 설칩니다.

     사람이 몸을 입고 땅 위에서 숨을 쉬고 사는 한 연약이라는 십자가를 벗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경험을 통해서 공감하고 있는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은 분수를 모르고 강함과 위대한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잊어버리는 순간부터 타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욕망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고 싶어 하고 그 욕망은 황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와 성공제일주의를 조장합니다. 그 욕망은 어느새 가장 중요한 삶의 이유와 원동력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이 이 세상을 죄인답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됩니다.

     이처럼 타락한 세상과 타락한 인간에게 연약함이란 수치며 악이라 생각합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타락한 세상에서는 강함과 위대함만이 최고 최상이라고 여깁니다. 강한 자 위대한자는 박스갈채를 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연약한 자는 무시되고 소외되며 부끄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타락한 세상 속의 타락한 사람들은 강함과 위대함을 욕망을 가집니다. 더 나아가서는 세상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교회에서도 강함과 위대함을 추구합니다. 마치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 양 이런 교회들은 세상과의 공간적 구분만 존재할 뿐,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영적 구별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교회의 세속화입니다.

      교회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고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몸입니다. 교회는 연약한 인간의 출생뿐만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영적 연약함까지도 공유하는 공동체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모르는 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 자신의 흉악한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는 자는 결코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는 자입니다. 강한 자가 되어 당당하게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모습 그대로 부족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겸손히 갈망하면서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병든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의원이 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들고 연약한 자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도 없고 구원도 없이도 살아 갈 수 있는 자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자를 찾으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될 자격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연약한 자를 도우시는 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연약함을 깨닫는 것이 축복의 시작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돕는다고 했습니까? 연약함을 깨닫는 자를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도우실 때 바로 축복의 시작입니다. 모쪼록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해질 때 복이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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