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는 숨겨져 있는 성도들의 진짜 속내를 잘 모를 때입니다. 제가 좀 단순한 편이기에 말하면 그대로 믿어 버리는 사람인지라 어떤 성도가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무언가를 말하면 잘 알아듣지 못하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사말로 한번 놀러 오세요 하면 전 정말 놀러가고요 속은 좋아도 싫다고 하면 정말 싫은 줄 알고사는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그래서 말하지 않는 진심을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한 교회의 집사님이 연말이 돼서 목사님에게 “목사님 나 이제 집사 그만할래요.”하고 말했답니다. 목사님이 그래도 그러면 되겠냐고 이제까지 잘하셨는데 내년에도 잘 감당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는데 그 집사님이 계속 그만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목사님은 할 수 없이 그 집사님의 청을 받아드려 다음 해 집사직에서 빼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더랍니다.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집사 그만하겠다는 말이 바로 나 권사되고 싶다는 얘기지 빼라는 얘기냐고 해서 시험들어 안 나온다는 얘기였습니다. 말의 뒤에 숨어있는 진실과 진심을 다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와이에서 목회를 할 때 만난 청년 중에 상일이란 친구가 있습니다. 하와이를 떠나 한국으로 나가는 날 새벽묵상모임에서 했던 고백이 생각납니다. 내가 하와이에 온 첫날, 이 새벽모임에 참여했는데 목사님이 비젼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앞으로 선교사 100명을 후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오늘 솔직히 고백하지만 그말은 내가 돈 많이 벌어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우회적인 표현이었지 정말 선교적인 열정이 있어서 했던 말은 아니었다고 솔직하게 얘기를 하며 자신의 숨겨진 진실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심방 중 목사에게 나 이교회에서 십일조 제일 많이 하는 성도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부탁을 할 때 그 소망의 이면에는 나 부자되게 되게 해달라는 욕망이 숨겨있는 것과 비슷한 얘기 같습니다. 이같이 우리는 진짜이유는 가리고 그럴듯한 것으로 포장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쉽게 “그거 꼭 말해야 아나?”라고 자신을 몰라주는 이들을 향해 불평하며 이야기 하지만 가족 간에도 성도 간에도 말하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진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열린 가슴도 모두가 필요합니다. 사람에게도 그러해야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겠죠.

<겸손이란>
      아무리 온순한 개라도 자기 밥그릇을 건드리면 사납게 대듭니다. 사람들 역시 자신의 이익이나 자리,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기거나 도전받으면 아주 사나워지고 공격적이 되곤 합니다. 자신을 지켜가기 위한 당연한 반응일 수 있을 겁니다. 그냥 빼앗기면 세상에서는 자기밥 그릇 못찾아 먹는 바보가 되거나 무능한 자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은 이런 바보들 때문에 아름다워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적도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있었던 일입니다.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슈바이처 박사가 도착할 기차역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기차가 도착하고 사람들은 1등칸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손님이 다 내릴 때까지 슈바이처 박사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2등칸을 타고 왔나 생각해서 사람들은 다시 2등칸 쪽으로 몰려갔습니다. 역시 거기에도 슈바이처 박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설마하는 마음으로 3등칸 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3등칸의 맨 끝에서 슈바이처 박사가 내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니,박사님처럼 귀하신 분이 왜 3등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1등칸을 타고 오시지 않구요?” 그러자 슈바이처 박사가 말했습니다. “4등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슈바이처박사는 분명 1등칸을 탈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었고 누구도 이 때문에 말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하나로 그가 어떤 분인지 그가 어떤 생을 살았는지를 느껴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당연한 권리와 자격이 있지만 그것을 이웃을 위해 포기하거나 나눠 주는 일, 나의 정당함과 의로움으로 마땅히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자신도 하나님의 판단 앞에 서야할 자임을 알고 판단치 않는 일, 내게 속한 소유와 권리로 내가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지만 연약한 자를 위해 참고 절제하며 더 귀한 가치를 위해 그것을 쓸 수 있는 용기 - 이것을 우리는 겸손이라고 부른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이에게 맺혀진 열매가 아닐까요?“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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