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땅을 몰래 파고는 가지고 있던 금화를 감추었다. 그런데 나중에 일을 보고 돌아오다가 땅을 파보니 금화가 온데간데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집 한 채가 의심스러웠다. 그 집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자기가 금화를 묻은 쪽으로 방문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을 했다. 그래서 그 집에 들어갔다. 시치미를 뚝 떼고는 “여보시오, 주인 양반. 나는 한양으로 금화를 운반해 가는 사람이오. 금화 중에서 하나는 500냥짜리고 하나는 1000냥짜린데 500냥짜리는 땅 속에 감추어 두었소. 이젠 이 1000냥짜리가 문젠데 이것을 사람에게 맡겨 두는 게 좋겠소? 아니면 전처럼 땅 속에 묻어 주는 것이 좋겠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집주인이 이렇게 말한다. “요즘 사람을 어떻게 믿습니까? 전에 묻어 둔 땅 속에 감추어 두는 게 훨씬 안전할 것입니다.” 나그네가 떠나자 그 주인은 얼른 금 500냥을 그 전에 있던 땅 속에 다시 묻게 된다. 결국 나그네는 잃어버린 돈을 무사히 찾았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더 많은 것을 얻을 것 같지만 결국은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는 것이 욕심이 가져오는 결과인 것이다.

      욕심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보편적인 질병이다. 욕심에 대해 초연한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누구나 감기에 걸리듯이 욕심이라는 병을 피해갈 수가 없다. 하지만 감기에도 자주 걸리면 폐렴으로 발전하기가 쉽다. 폐렴은 몸의 다른 장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게 된다. 미국에서 1년에 5만 명 이상이 폐렴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욕심도 이와 같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 죄가 장성하면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 결국 신앙은 욕심을 얼마나 제어할 수 있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 10계명 가운데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이 바로 탐심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있는 살인, 간음, 도둑질이 대부분 욕심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전서6:10에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욕심은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 욕심 때문에 믿음도 지키지 못한다. 수많은 근심과 걱정이 바로 욕심 때문에 온다는 것이다.

      욕심을 경고하기 위한 예수님의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이다. 농사를 잘 짓는 부자가 있었다. 올해는 지난해 보다 유난히 추수량이 더 많았다. 지금 있는 곡간으로는 그 수확물을 저장하기가 많이 부족했다. 지금보다 몇 배의 곡간이 더 필요했다. 커다란 곡간을 지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얼마나 행복한 고민인가? 남들보다 열심히 일했다. 정직하고 성실했다. 그 동안 누구에게 해를 끼친 것도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한 만큼 풍성한 결과를 누리는 대표적인 사람의 모습이다. 이 부자는 오늘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시민의 모습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누구에게 손가락질당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주어진 자기의 길을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을 가리켜서‘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다. 왜 이 사람이 어리석은 것인가? 이 사람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감사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 부자의 삶 어디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남보다 소출이 많았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이스라엘은 비가 오지 않는 곳이다. 일 년에 두 차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온다. 농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이다.

      소출이 많다는 것은 두 차례의 비가 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감사할 일이다. 비만 가지고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매일 아침 들판에 나가보면 이슬이 촉촉하게 대지를 적신다. 매일 내리는 이슬이 없이 곡식은 자라지 않는다. 이슬 역시 감사의 큰 이유여야 한다. 1년 내내 건강했다. 열심히 밭에 나가 일할 수 있었다. 일군들 역시 게으르지 않았다. 속도 썩이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자는 한 마디의 감사도 없다. 단지 자기가 가진 것이  부족해 보이기만 한 것이다. 더 많이 쌓을 것만을 걱정하고 있다. 탐심이라는 말이 사전에는 이렇게 정의가 내려져 있다. “가진 바를 족한 줄로 여기지 못하고 더 가지려는 마음.” 우리 삶에서 만족을 얻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원하는 대로 다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욕심만 키울 뿐이다. 어느 기자가 이름난 갑부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현재 가지신 재산에 만족하십니까?” “아닙니다. 전혀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더 있으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 “조금만 더 가지면 됩니다.” 끝이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가진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얼마를 가졌던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에 감사하는 것이다. 행복이 사는 집이 두 곳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천국이다. 또 하나가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감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향기를 준다. 그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가는 감사의 깊이에 달려있는 것이다. 감사와 욕심은 서로 상극이다. 감사가 있는 곳에 욕심이 자리를 잡지 못한다. 하지만 욕심이 가득한 곳에는 감사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는 감사의 조건이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에덴 동산을 주신 축복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을 구분해 주는 거룩한 경계선이었다. 내가 누군지를 알려주는 선생이 바로 선악과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탄의 유혹을 받은 하와의 마음속에서 감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감사가 떠난 자리를 욕심이 자리를 차지하고 만 것이다. 욕심은 점점 자라기 시작했다. 남편인 아담을 끌어들였다. 심지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다. 결국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만 것이다. 죄의 뿌리는 바로 욕심에서 오는 것이다. 욕심을 극복하는 방법은 감사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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