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 함석헌 선생(1901~1989)이 1947년에 쓴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를 저는 참 좋아합니다.
/만 리 길 나서는 길 / 처자를 내맡기며 /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탔던 배 꺼지는 시간 /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불의의 사형장에서 /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 “저 하나 있으니”하며 /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 시가 좋은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 이야기를 쓰고 있는 시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사람이 사람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근거를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 행복의 중심에는‘사람’이 있습니다. 이 시에서 질문하는‘그 사람’이 있는 사람은 무척 부러우리만큼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람 때문에 행복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 시에 등장하는‘그 사람’과는 정반대의 사람들과 관계를 가져야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신약성경‘디모데후서’에도‘그 사람’을 가졌을 법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 선생입니다. 그는 습기 차고 차디찬 로마 감옥 속에서도 ‘그 한 사람’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행복하고 기쁘게 했던 ‘그 사람’이 누군 줄 아십니까? ‘디모데’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는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늘 생각나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디모데후서1:3-5) 바울 선생님은 감옥 속에서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쉬지 않고 디모데를 생각합니다. 그의 눈물을 생각하고, 그의 거짓 없는 믿음을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을 늘 마음에 떠올리며 생각하면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디모데에게 ‘너 보기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왜 보기를 원합니까? 기쁨이 가득하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내 생각 속에 있는 너를 보아야 내 기쁨이 가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이 편지 말미에서 디모데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디모데후서4:9),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디모데후서4:21) 어서 내게로 오라고 거듭거듭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 디모데를 보고 싶어 하는 바울 선생님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바울 선생님에게는 자신을 행복하고 기쁘게 해 줄 ‘그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퍽 힘들어질 때도 있습니다. 좋아해야 할 사람을 경계하게 되고 도사리게 되고 모질어질 때가 있습니다. 한때 저에게서 이런 모습을 발견하고 몸서리치게 놀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나 자신을 되잡기 위해 40여 년 전에 교회 청년들을 가르치며 소개했던 빛바랜 시 한 편을 꺼내 들고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제목이“아무나 보듬고 싶다!”(시인 김준태)라는 시입니다.

     /이제 아무나 보듬고 싶다 / 무식하게 정말 일자무식하게 / 사람이여 환장하게 좋은 사람이여 / 아무나 보듬고 설레이고 싶다 / 그리하여 더욱 아무나 보듬고 / 우리가 사람과 사람이라는 놀라움을 / 강물에 입술 적시듯 노래하고 싶다 / 생명이여 생명의 소중한 것들이여 / 이제 나는 아무나 보듬고 싶다 / 사람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 이제 나는 아무나 보듬고 싶다 / 우리가 너무 깊이 보듬어 / 마음에 행여 가시가 박힌다 손 / 육신에 행여 손톱자국이 머무른다 손 / 생명이여 생명의 소중한 눈동자여 / 사람의 뼈는 하늘의 기둥! /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는 자신 다음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기꺼이 바로 ‘그 사람’ 디모데를 향해 “너도 나처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1:8)고 유언처럼 부탁합니다. 아마도 생각하기를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이제까지 해왔던 사역들, 곧 복음 전파와 교회를 목양하는 이 사역을 과연 누구에게 부탁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 순간 주저 없이 떠 올린 사람이 디모데였습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디모데후서2:2) 지금 바울에게 있어서 자신의 다음을 부탁할 수 있는 충성된 사람은‘디모데’입니다.

      그 디모데에게‘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하라’고 합니다.‘나를 통해서 너에게로 이어진 이 사역들이 너의 충성된 사람에게로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목회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결국은 ‘사람’입니다. 다음을 부탁할만한 ‘충성된 사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하면 기꺼이 자신의 다음을 부탁할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바울에게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 한 말 ‘의주 상인 임상옥’이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하지요? “장사란 이익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목회도 결국은 다음을 부탁할 ‘사람’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12제자라는 ‘사람’을 남기시고 이 세상을 떠나가셨고, 사도 바울 선생님도 ‘디모데’라는 ‘그 한 사람’을 남기고 초대교회의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곁에도 그 한 사람 때문에 행복해 지고 다음을 부탁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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