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인테리라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당파주의(혹은 종파주의)로 자신들을 다른 이들과 나누며 진리가 아닌 교리의 담을 쌓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린도교회가 생각납니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1:12) 이런 종파주의자들을 북에서는 김정은의 고모부 장경택이 당했듯이 즉각 숙청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은 사람, 야베스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경(my territory)을 넓히시고...’(대상4:10) 생각의 지경, 행동의 지경, 사상의 지경, 관계의 지경, 특별히 성경(진리)의 지경이 넓어야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내 교회, 내 신앙, 내 기도, 내 은사, 내 믿음만 사수하는 모습은 결국 실망하게 만듭니다.  ‘다른 교회에 나가면 하나님 아저씨가 계시고 우리 교회에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것도 아닌데...’ 나와 다른 이들을 향해 웃어주는 것, 이보다 더 큰 기도는 없습니다.

      하기는 종교뿐일까, 처음에는 신성하던 것이 조금 헤게모니를 얻고 나면 모두 본디의 뜻을 잃고 마는 것이 세상이치인지라...결국 사람이 그러한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내신 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뭇잎치마로 자신들의 수치를 가려보려고 애쓰는 그 부부에게 손수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앞으로 죽음과 노동과 출산의 고통을 예고해 주신 것이 사랑이라는 그런 생각.... 많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에게 고통과 결핍은 가장 좋은 학교니까... 안주하게 되면, 편안하게 되면 사람은 처음의 신성함을 읽고 마는 그런 약한 존재이니까요. 혁명! 사실 그것은 트로츠키의 표현을 빌자면‘더 이상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가하는 치명적 외과수술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것은 많은 다른 사람들을 수고스럽게 만들고, 필요한 것은 고장 난 인생에게 존재적 혁명, 나라의 혁명, 우주적 혁명(종말)이 절대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두 달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하늘에서 내려다 본 라인강과, 공항의 분위기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만으로도 나는 독일의 성숙하면서도 차분한 그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이 하나같이 반듯하고 성실하고 검소했습니다. 이 좋은 느낌의 배경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동서독 통일이 떠올랐습니다. 독일 베를린의 한복판에 있는 브란덴부르크문은 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있던 분단 독일의 상징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45년 동안 이 문은 문이 아니라 동서독을 갈라놓은 장벽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원하게 트인 문으로 자동차와 사람들의 물결이 거침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브란덴부르크문은 사실 우리의 판문점과는 다릅니다. 먼 강원도 산골짝의 녹슨 기찻길에 있는 우리 판문점과는 달리 독일의 장벽은 수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독일인들의 가슴에 일상의 아픔이었습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 그렇게 멀기만 한 판문점에서 며칠 전 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북의 김정은과 역사적 회동을 하면서 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북쪽으로 스무 걸음 넘어갔다 다시 남쪽으로 넘어오는 트럼프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외쳤습니다. “Thank you 트럼프!”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66년 동안 단절된 그 분단의 아픔의 현장에서, 미국 대통령과 남한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이 악수하며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 우리 조국의 미래가 녹아있는 것만 같습니다. 나는 큰 꿈이 없습니다. 그저 힘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저 평양가서 성경통독도 하고, 옥류관에 가서 그 유명한 평양냉면 먹을 소박한 마음으로도 행복합니다.

       베를린의 중심부를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흐르는 슈프레 강가에는 강을 따라 2Km에 달하는 동서독 분단 시절의 장벽이 남아있습니다. 그 장벽에는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환희를 새긴 수많은 글과 그림들이 가득합니다. 이 글과 그림들은 지난 세월 독일인들이 치러야 했던 분단의 아픔과 희생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상은 하늘을 나는 새들의 비행처럼 자유로운 것이다’ 분단이란 땅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을 가르려고 하는 헛된 수고임을 깨닫게 하는 글귀입니다. 가는 곳마다 글씨를 파 넣는 코리언의 기질은 터키 에베소에 있는 누가의 묘 앞에도 ‘누가의 묘’라는 한글 표지판을 세워놓았습니다. 터키 정부도 안하는 것을...그 기질대로 분단의 벽에도 누군가 한글로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우리도 하나가 되리라”

      이 염원처럼 판문점의 악수로 이어질 우리 조국의 통일, 그래서 ‘내가 이겼다’가 아니라, ‘우리가 이겼다’고 외칠 수 있는 더 성숙한 우리 조국을 위해 ‘내’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경계가 없는데 기독교인은 경계가 너무 많습니다. 진리는 너무 커서 당연히 늘 새롭고, 작고 낡아서 거짓으로 변해버린 것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길로 가는 문은 고통스럽습니다. 이 고통을 피하려는 자들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진리를 없애는 일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제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는 십자가 처형이라는 길을 통하여 완성됩니다. ‘주여 내게 복을 주사 내 지경을 넓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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