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어릴 적 ‘호국보훈’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따분했었다. 그러나 어느새 이 말이 가슴에 와닿는 나이가 되어버렸는지, 6.25 한국전쟁기념일을 앞두고 그 뜻을 다시 한번 새겨보고 싶어졌다. 호국보훈은 나라를 보호한다는 의미의 ‘호국’과 공훈에 보답한다는 ‘보훈’이 합쳐진 뜻이다. 한국은 6월이 되면 초순에는 추모의 기간, 중순에는 감사의 기간, 말에는 화합과 단결의 기간으로 나누어 내내 호국보훈 행사들이 진행된다. 다시 말해, 6월은  6.25 전쟁에서 희생된 분들을 기리는 달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대한민국은 드디어 독립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1943년 12월에 발표된 카이로 회담에서 약속된 독립은 이행되지 않았고,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정치가들 사이에서도 이념적인 대립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1948년 9월 한반도에는 두 개의 체제가 들어섰다. 남쪽에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북쪽에는 공산주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수립되고 난 후 김일성은 무력 남침을 구상하고 있었고, 1949년 3월 17일 소련을 방문하여 북한과 소련은 군사 비밀협정을 체결했다.

      이때 소련은 북한에 소총 1만5천 정, 각종 포 139문, 전차 87대, 항공기 94대 등의 무기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고, 중공과도 상위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중국 공산군에 있던 조선군 2만 5천 명을 북한으로 보냈다. 그리고 1950년 4월 초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무력 통일안을 확정시켰다. 이내 소련의 스탈린은 1950년 6월 16일 남침 개시일자를 6월 25일로 승인했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 이처럼 6.25전쟁은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발발했다. 북한군은 소련에서 공급받은 최신 무기와 대전차를 내세워 남쪽으로 거침없이 내려왔다. 대전차조차 없었던 남한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결국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북한군은 서쪽의 옹진 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동두천, 포천, 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했으며,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는 육전대와 유격대를 상륙시켰다. 전쟁 발발 이틀만인 6월 27일 새벽 3시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탈출했지만 이 사실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결국 28일 새벽 2시 국군은 공산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한강대교를 폭파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밀리고 밀려, 9월 14일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여차하면 전쟁은 북한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세를 뒤엎는 사건이 일어났다. UN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이끈 인천상륙작전이 바로 그것이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북한군의 보급로가 차단되었고, 같은 달 27일에 수도 서울을 수복하게 된다. 이 기세를 몰아 10월 1일에 마침내 38선을 돌파해 압록강, 두만강까지 북진을 하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전세가 갑자기 역전이 된 것이다. 결국 UN군과 중공군이 포함된 북한군은 38선 부근에서 교착상태에 들어가면서 뺏고 빼앗기는 땅따먹기가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38선 부근은 치열한 전투장소가 된 것이다. 긴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1,129일 동안 계속된 전쟁은 휴전상태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종전협정이 체결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휴전 이후 우리나라는 학교, 공공시설, 도로, 철도, 교량 등 많은 산업시설들이 파괴되었다. 물적 피해액은 2년 치의 국민 총생산액에 달했다. 여기에 군인과 실종자가 62만 명, 민간인 부상 실종자가 백만 명, 유엔군 사상자와 실종자도 15만 명에 달했다. 또 수십만 명의 전쟁고아와 미망인이 발생했으며 가족과 헤어진 이산가족도 천만 명에 달한다고 보고 되고 있다.  이렇게 한국전쟁은 끝이 났지만 끝내 잊혀진 이들도 있다. 군적에도 없으며, 군번도 없는 용사, 학도 의용군이 그렇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30만의 학도 의용군들이 나섰다. 한창 학교에서 공부를 해야 할 10대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연필 대신 총을 들었다. 기본 군사훈련도 받아보지 못했지만 나라를 지키겠다고 전선으로 나간 것이다. 미군들은 이런 학도 의용군을 보며 ‘베이비 솔저’라고 불렀다.

      어린 나이에 전투에 참여한 학도 의용군들은, 살면서 한 번도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해보지도 못했던 그 아이들은, 전쟁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고, 본인들도 생명을 잃었다. 잊혀진 사람들은 또 있다. 한국전쟁 당시 철도를 이용해 유엔군을 이동시켰던 철도 기관사들도 잊혀진 이들 중에 속한다. 이들은 포탄이 날아다니는 그 전쟁 통에서도 스스로 자원해 유엔군을 실어 날랐다. 그렇게 한국전쟁 과정에서 순직한 철도 기관사만 3백여 명이 넘는다. 기껏 행적을 찾은 6.25 참전용사들도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은 훈장과 함께 긴 가난을 물려받았다. 말로는 "당신들이 있어서 이렇게 삽니다" 라고 하지만 보훈교육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참전용사 87%가 생활이 어렵다. 정전협정 이후 2000년까지는 지원 자체가 아예 없었고, 이후 참전 명예 수당을 받았다고 해도 2002년에는 5만원, 2013년에는 15만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20만원까지 올랐지만 여전히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다. 이들의 거룩한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다. 때문에 잊혀진 영웅들을 찾아 이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미국의 경우 퇴역군인에 대한 예우는 깍듯하다. 퇴역군인의 집과 병원 시설을 별도로 만들어 최상의 노후생활을 보장하고 있는가 하면, 공무원 채용 시 가산점도 정확하게 적용하고 있다. 제대한 군인들의 복지를 관할하는 미국의 퇴역 군인부는 국무부와 국방부에 이어 부처 서열 3위에 있을 정도로 막강 파워를 자랑한다. 대한민국도 한국인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를 다시 한번 따져봐야 할 때이다. 참전용사와 같은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최대한 표시하는 것은 후손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올해로 6.25전쟁 69주년, 정전 66주년을 맞았지만 아직까지 한반도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북한이 대한민국을 또다시 침범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도 없다.  북한 김정은도‘한국과의 평화’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우리는 2차 대전 직전 독일 히틀러와 한 약속을 믿고 평화를 선언한 영국 체임벌린 총리의 우매함을 기억하고 있다. 6.25 전쟁 발발 한 달 전 북한 공산당도 침략 계획을 은폐하기 위해 남북통일 최고 입법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고,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등,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평화공세를 펼쳤다. 그동안 우리는 그들의 위장 평화공세에 속을 만큼 속았다. 진정한 평화통일 조국이 탄생되기 전까지 막연한 희망과 뜬구름 같은 평화정책에 휘둘리는 일은 더이상 없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전쟁으로부터 얻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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