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가장 좋은 스승이라고 합니다. 여행을 통해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그네 인생의 실체를 보고 듣고 배울 수 있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는 자주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사는 거 별거 아냐. 사는데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아. 그러면 자꾸 나만 다쳐’ 조국의 ‘한비야’라는 자매는 십년 동안 배낭 하나만 메고 홀로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본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사는데 배낭 하나면 족해요’ 여행은 이렇게 과욕의 때를 빼는 데 아주 효과가 있습니다. 지난 두 주간 “내가 지칠 때, 나는 지금 내 영혼이 어디를 가고 싶어 하는지 주의 깊게 보겠다, 인생에서 쉬는 날이 어디 있겠어” 내 처지를 스스로 각인하며 그리스와 터키(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두 주 전 새벽에 떠나 독일 프랑트푸르트를 중간다리로 45명의 팀들과 감동의 먼 여정을 마친 5월4일 토요 저녁, 집에 도착하자마자 매운 김치볶음밥으로 향수적 허기를 달래고(선택의 여지 없이 그들이 고민 없이 던져주는 올리브 기름과 특유의 향료 음식에 질린 터라) 오랜만의 단잠에서 깬 주일 새벽은 한마디로 상쾌! 그 자체였습니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야, 역시 집이 좋아’ 세상 편한 기지개 속에 두 주간의 발자취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덴버를 떠난 루프탄자의 비행기 안에서 올곧이 하루를 지새고, 다음 날 저녁 과거로 먹고사는 나라 그리스 남동부 아티카 반도의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는 수도 아테네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서 왠지 가난한 냄새가 배어나왔습니다.

     아크로폴리스 호텔이라는데 방문도 열쇠로 여는 구식이었습니다. 실망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이튿날 일찍 파르테논 신전에 올라가 신들의 보스 제우스를 비롯하여 그의 아내 헤라와 포세이돈. 아테네.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프로디테. 헤파이스토스. 아레스. 헤르메스. 데메테르. 헤스티아이...등 올림푸스의 신들을 만나보니, 우리와 똑같이 싸우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잔혹하게 복수하고,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 이야기라고 설명하는 유능한 가이드와 함께 우리를 태운 리무진 버스의 운전기사가 얼마나 운전을 잘하는지 90도 각도의 골목도 원샷으로 꺾었습니다. 이름이 ‘니코라우스’라 제가 운전의 신(神) <니코>라고 불러주었습니다. 신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그리스의 신은 별거 아니더라고요.

     아테네에서 정확히 36.75Km 떨어져 있는, 올림픽 때마다 봉화를 붙여오는 마라톤 평원이 오히려 그립습니다. 당시 세계최강을 자랑하던 페르시아의 대군을 맞이하여 고립무원의 아테네 병사들이 절망적인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를 물리친 격전의 땅입니다. ‘레오니다스’와 300인의 스파르타가 눈에 밟혀옵니다. 두 마음을 넘나들고 있는 나 자신이 당황스럽지만, 생각해보면 이 마라톤 전투의 승리는 단지 아테네를 지킨 승리에 그치지 않고 ‘유럽’을 만들어낸 승리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그리스 사람들을 만나고 보니 전쟁의 승패나 나라의 흥망 역시 역사라는 유장한 세월에 비추어 보면 한바탕 부질없는 춘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 병사가 숨을 거두며 외쳤던 한마디 “우리는 이겼다”가 쓸쓸한 감상에 젖어오는 까닭은 ‘내’가 ‘우리’를 이겨야 하는 현실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테네는 이른바 소피스트(현인)라고 불리는 철학자들도 많습니다. 아크로폴리스를 내려오면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감방을 찾았습니다. 석벽을 파서 만든 허물어진 감방에는 싸늘한 기운이 고여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51세에 결혼했는데, 그의 아내 ‘크산티페’가 악처로 소문났지만 사실은 너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남편 소크라테스가 너무 무능했기 때문이지요. 창살을 잡고 한동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가 외쳤던 ‘너 자신을 알라’가 들려옵니다. 그 감방을 떠나며 스스로 이렇게 다짐하고 내려왔습니다. ‘너나 잘하세요’ 예수 믿는 내가 그 위대한 철학자 앞에서 조금도 꿀리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덕으로 먹고사는 나라, 사도 바울의 발품에 먹고 사는 나라, 터키 땅에 왔습니다. 에덴동산의 강(유프라테스, 티그리스)이 지금도 흐르고 있는 나라, 아브라함의 고향(갈대아 우르)이 있고, 아라랏 산(홍수 후 노아의 방주가 머문 산)이 있는 나라, 90%가 무슬림이라는데 사람들은 자유로웠고, 여인들은 히잡(Cover)을 쓰지 않았습니다. 어디를 가나 에덴동산의 풍요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대한민국! 짜짜짠 짜짜!의 엇박자가 아직도 녹아있는 축구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물건만 사면 상인들은 ‘I love Korea!’를 외칩니다. 에베소, 라오디게아,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버가, 앗달리아...무너진 초대교회의 엄청난 지경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여정의 종점 이스탄불에 왔습니다.

     이스탄불은 나의 의식 아득히 먼 곳에 있었습니다. 이스탄불과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비잔틴이 구별되지 않는 몽매함으로 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 앞 광장에 섰습니다. 바로 벤허의 쥬다와 대적 메살라의 전차경주를 촬영했던 광장이라고 합니다. 소피아 성당은 로마에서 세계의 중심(Omphalion)을 이곳으로 옮겨온 비잔틴 문명(동로마)의 절정을 보여주는 명소입니다. 지름 32m의 돔을 지상 56m의 높이에 그것을 받치는 단 한 개의 기둥도 없이 올려놓은 불가사의한 건물입니다. 천정의 원형 돔에 오스만터키가 덧칠해 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애잔합니다. 오늘도 수많은 순례객들로 넘쳐나는 이스탄불이 보여준 것은 동서양 문화의 다양한 공존이었습니다. 성당과 모스크, 실상과 허상, 모스크의 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허구를 보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소망이라고 터키 땅도 외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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