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적(敵)을 만들지만 신앙은 친구를 만듭니다. 신앙이란 ‘보편적 가치를 구현한 주체(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 보편적 가치를 따르는 삶이 인류의 올바른 정신과 문화를 형성하는 기반이지요.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이 절대적인 보편적 가치에 대한 철학적 회의가 깊어가고 있습니다. 신앙인이 아닌 종교인들로 인해 오히려 보편적 가치가 신뢰감을 잃고 그래서 강력한 적 포스트모더니즘(탈 현실주의)이 일체의 보편적 가치 이념에 회의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뉴에이지(범신론)가 파생되었습니다, 뉴에이지란 ‘지금까지의 금기를 금기하는’것입니다.‘전에는 죄였지만 지금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18:22) “That is detestable” 가증하다는 말은‘구역질난다, 토해버리고 싶다’라는 뜻이지요. 모든 법의 근간이 되는 모세의 율법은 이 “가증한”자들을 사회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분명하게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라.., 남자나 여자나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일지니라’(레20:10-16) 성경에는 반드시 죽여야 할 죄가 있다고 합니다. 종교적 율법은 곧 세속적 법률이였으므로, 당시에 이 모세의 율법은 글자 그대로 충실히 지켜졌을 것입니다. 이 보편적 가치가 때로 좀 약해지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양심의 법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날 이런 논변을 펴는 이는 기독교의 보수적 일파뿐입니다. 중세기에 이르기까지 특정 종교집단에만 타당했던 도덕성을 근대사회 일반에 강요하던 시대는 지났다고 합니다. 아직도 자기의 종교적 신념을 사회 일반이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제시하는 집단이 있다면, 그 집단은 일단 광신도파로 여깁니다. 이 신학적 논증에 대하여 두 개의 논점이 존재합니다. ‘성 정체성과 종교적 정체성의 충돌’입니다. <새무얼 헌팅턴>은 이것을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이라고 칭하며 세계 질서 재편의 핵심 변수는 ‘문명’(문화)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공공 화장실 출입이 대부분 “All gender”로 바뀌고 있습니다. 남녀 구별 없이 Gender도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로 갈등하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많다고 합니다.

      한 기독교 잡지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죄인이지만, 그 죄인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는 반대한다’라고 주장하더군요. ‘Love the sinner, Hate the sin’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 같지만, 모든 것을 죄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the speck of sawdust)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the plank)는 깨닫지 못하느냐...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3-5) 우리는 죄보다 사람을 봐야합니다. 길가에 있는 소경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2-3) 이것이 보편적 가치를 구현한 주체이신 예수님이 보시는 ‘사람의 보편적 가치’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는 통로입니다.

      이런 삶이 가능한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결정이 100%, 아니 80%라도 하나님의 지시와 지배를 받을 정도로, 우주의 중심이신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 가운데 살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릴 만큼 주님이 나에게 임재하실 수 있을까? 에녹처럼 주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을까? 가능합니다. 성경을 펼치면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분의 어휘를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윽고 하나님을 알면 사람과 죄가 분명해집니다. 인간은 전적 부패한 죄인입니다. 죄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사람을 보면 죄가 보입니다. 그래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 보편적 가치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생활방식이 저절로 된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일입니다. ‘1분마다 주님을 생각하기’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프랭크 로바흐>는 문맹퇴치 운동을 일으킨 분입니다. 하지만 그의 일기에는 그가 일생동안 전혀 다른 목표를 위해 노력했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이였습니다.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 동안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수 있는지 관찰했습니다.‘50%의식..25%의식...80%의식..때로는 실패...’ 날마다 퍼센트로 적었습니다. 이것은 즐거운 영적연습입니다. 그분이 임재하면 이 땅의 수고도 침울한 의무가 아니라 즐거운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봄의 언저리에서 그분의 언어를 아는 이들에게는 모든 사람, 모든 사조, 모든 나무, 모든 새, 모든 꽃, 모든 색깔이 분명하게 살아 있습니다. 철학적 회의에 속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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