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좋지 않은 습성을 풍자한 속담 중에 '독 속의 게'라는 말이 있다. 커다란 독 속에 게를 풀어놓으면 저마다 밖으로 기어 나오려고 발버둥친다. 그러나 결국 한 마리도 나오지 못한다. 밑에 있는 게가 올라가는 게를 끊임없이 물고 당겨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오늘은 신년을 맞아 더불어 잘 사는 방법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이민 초기에는 몇 안 되는 한인들이 오손도손 사이좋게 지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한인사회의 규모가 커졌고 목소리가 큰 사람들이 등장했다.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던 사실들은 오히려 약점으로 이용되어 원수가 되어갔다. 죽마고우처럼 지냈던 시절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각자의 반대세력에 힘을 보태기 위해 상대방의 집안 내력, 여성편력, 술버릇까지 동원하면서 서로에게 흠집을 냈다. 그래서인지 모이기만 하면 ‘편가르기’를 하기 위한 수다를 떨고 있다.

     이민사회가 각박한 이유는 한국을 떠나 뿌리 없는 나무로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불어 사는 방법에 서툰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회에 살다 보니 각박하다 못해 정나미가 떨어질 때가 많다. 특히 뒤통수를 맞게 되면 더욱 그렇다. 한 단체장이 사무실에 와서 다른 단체장에 대한 욕을 한참을 하고 갔다. 다음날 취재를 할 일이 있어 행사장을 찾았는데, 그 회장은 침까지 튀겨가면서 욕을 했던 그 사람과 아주 의좋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장면이었다. 전날에는 다시는 인사조차 안 할 태세더니, 하루 만에 어찌 저렇게 태도가 돌변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회장의 감언이설에 대놓고 동조를 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실감났다.

      처음부터 야합을 목적으로 뭉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오히려 자신의 즉흥적인 개인 감정에 치우쳐 이 사람 저 사람을 끼워 편가르기를 하는 모양새가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전세가 언제 어떻게 역전될 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제 한 말을 바꿨다고 그를 비난할 필요가 없다. 오늘 뒤통수 맞았다고 상처받을 필요도 없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될 수 있기에, 적과의 동침을 적당히 즐길 줄 아는 자만이 인생의 재미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영국에는 "부자가 되려면 부자에게 점심을 사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대체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사촌을 대접해서 그의 지혜를 배울 줄 모른다. 우리는 넓은 세상 큰 외적과 상대해 이길 생각을 하지 않고, 같은 업종, 가까운 이웃부터 밟고 올라서려고 한다. 정치는 그런 동네가 된 지 오래지만 자잘한 밥벌이까지도 마찬가지 같다. 모함과 비방도 서슴지 않는다. 몇 년 전 경기도 한 제과점 빵에서 쥐가 나왔다는 고발이 인터넷에 떴던 기억이 난다. 조사결과 경쟁 제과점 주인이 벌인 자작극이었다.

      우리는 매일같이 적과 동침을 하고 있는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에서는 마치 내편인 듯, 나의 모든 행동이 대단한 결단인 양 적극적인 후원 멘트를 해주다가도, 비난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가차없이 그들과 한 팀이 되어 동조를 하곤 한다. 중국인들은 서로 돕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각 주마다 차이나 타운이 유명 관광지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다. 중국인의 경우 1명이 봇짐을 들고 공항에 내리면 중국인 10명이 십시일반으로 도와 가게를 낼 수 있게 해준다. 다음 번에 다른 중국인이 오면 이번에는 중국인 11명이 도와서 자리잡게 한다. 한국인은 1명이 이민 오면 10명이 달려들어서 벗겨 먹는다. 또 다른 한국인이 오면 이번에는 11명이 달려든다. 한때 해외 동포사회에 돌던 얘기다. 나보다 잘난 타인에 대한 시기심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 마음 깊이에 자리한 보편적인 감정이다. 독일어에 ‘샤덴프로이데’라는 말이 있다. 잘 나가는 사람, 그것도 자신의 분야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불행해졌을 때 드는 오묘한 쾌감을 일컫는 독일어다. 우리 조상들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로 이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열등감 폭발’을 줄여서 ‘열폭’이라고 하는 인터넷 유행어도 있다.

      영화 <모짜르트>에서 궁중악사 살리에르는 젊은 모짜르트의 음악적 재능을 시기한 나머지 그를 정신적인 궁지에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모짜르트를 죽인 후 그는 후회와 자책, 자괴감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모짜르트를 시기했던 것은 잠깐이지만, 그 시기심을 이기지 못한 대가로 살리에르는 평생을 모짜르트의 그늘 속에서 허우적대며 살아가다 죽은 것이다. 시기심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그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과 환경, 성향,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다. 당연히 처한 조건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고, 잘하는 것과 잘하지 못하는 것이 다르다. 똑같은 사람은 없다. 나는 그들이 아니고, 그들도 내가 아니다. 그들의 성공을 내가 꼭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성공과 나의 행복의 기준은 타인의 그것과 다르다. 사촌이 산 땅이 부럽다고 해서, 그 땅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나에게는 숲이 혹은 바다가, 혹은 도시의 작은 집이 더욱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이 이룬 것 말고,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면 된다.

      몇 년 전 한국업체들이 북한 개성공단에 들어가면서 가장 인기 있는 간식은 오리온에서 생산하는 초코파이였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이 4만6000명의 근로자 간식으로 초코파이를 나눠주었다. 간식으로 제공된 이 초코파이는 암시장을 통해 유통되면서 북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암시장에서 거래되던 초코파이 한 개 가격은 쌀 1kg 가격과 비슷했다. 개당 4∼5달러, 비싸게는 북한 노동자 월급의 10∼20분의 1수준인 10달러에 유통되기도 했다. 식량난이 심각한 북한 사정을 고려하면 무척이나 비싼 가격이다. 특히 환갑이나 생일날 잔칫상에 남한 초코파이를 풍성하게 올려놓는 것이 부의 상징으로 통할 정도였다니 그 인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때 북한의 화폐로 통용될 정도로 이 초코파이의 열풍은 실로 놀라왔다. 영국의 한 일간지가 “마시멜로우로 채운 작고 동그란 파이가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북한을 서서히 변화시킬 것”이라고 예견했듯이 말이다.

      살다 보면 온전치 못한 사람도 접한다. 나와 다른 사람은 사방에 존재한다. 공산국가와는 달리 억압과 강요가 존재하지 않는 이 자유 민주주의 땅에 살고 있지만, 질투와 시기심으로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 많다. 생각해보니 이런 사람들에게 이데올로기까지 초월하게 만든 초코파이와 같은 존재를 찾아주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 같다. 한국에서 초코파이 광고의 주제는 마음을 힐링하면서 따뜻함을 함께 나누자는 의미의 ‘정(情)’이다. 이런 의미를 지닌 초코파이가 북한뿐만 아니라 이곳에도 필요하지 않을까. 유유상종이라고 했다. 잘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언젠가 나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오늘부터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하지 말고, 오히려 함께 축하를 해주면 어떨까. 그래서 그의 지혜를 배워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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