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동안 숱한 파문을 일으킨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일본 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피해자의 승소로 지난달 30일 종결됐다. 대한민국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 등 4명이 일본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신일철주금은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한국 법원이 일본 기업에 일제 피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은 광복 73년 만이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50년이 지나서야 희망이 생겼다. 강제징용 피해자인 94세 이춘식 할아버지와 이미 돌아가신 다른 세 분이 판결의 주인공이다. 이분들은 1941~1944년 사이에 일본제철의 오사카 공장 등지로 끌려가서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1945년 일본이 패전한 뒤에 귀국했다.

    이번 재판은 1991년 일본의 한 교수가 발표한 보고서가 시발점이었다. 도쿄 고마자와 대학 고시오 다다시 교수는 ‘연행 조선인 미불금 공탁보고서’를 한국의 강제징용 피해자 단체에 전달했다. 이 자료에는 당시 징용한국인 노무자의 명단과 이들이 받았던 급료, 고용일자, 해고사유, 개인별 미불임금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이후 할아버지들은 1997년에 손해배상금과 미지급 임금을 달라면서 일본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소송을 냈지만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했다. 비슷한 시기에 부산지방법원에도 소송을 제기했는데,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소했었다. 그런데 2012년 대법원에서 대반전이 일어났다. 대법원은 "불법 식민 지배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며 사건을 2심 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대법원 판결 취지대로 "신일철주금은 피해자에게 1인당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신일철주금이 불복해 사건은 2013년 대법원에 다시 올라왔고, 지난 7월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 회부된 것이다.

    이  재판의 쟁점은 1965년 청구권 협정에 강제징용 피해 배상이 포함됐는지 여부였다. 일본이 제공한 청구권 자금으로 일본 측 배상이 끝났는지, 청구권 협정과는 별개로 개인 청구권이 존재하는지가 중요한 판단 대상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청구권 협정은 불법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한 협상이 아니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며 일본이 협상 과정에서도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피해 배상을 부인했기 때문에 위자료 청구권이 협정에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번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 정부의 억지는 갈수록 가관이다. 판결이 나자마자 주일 한국대사는 일본 외무성에 불려가 화풀이를 받아주어야 했다. 고노 다로 외무상은 이수훈 주일 대사에게 악수도 청하지 않은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태도는 더욱 황당했다. 아베 총리는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면서, 해당 기업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어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일이니 배상이나 화해에 응하지 말라며 정부차원에서 기업을 선동하고 있다.

    그리고는 한술 더 떠서 그동안 사용해온 ‘징용공’ 표현 대신 앞으로 ‘한반도 출신 노동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사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이 쟁점화된 후 지금까지 '징용공(徵用工·강제징용 노동자) 문제'라는 표현을 써왔다. 하지만 아베 내각이 대법원의 판결 이후부터 '한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이는 한국인이 강제로 동원됐다는 의미를 약화시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비롯, 앞으로의 사태 진전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징용 노동자를 일반 노동자로 둔갑시키는 발언은 참으로 뻔뻔한 억지 주장이 아닐 수 없다.‘징용’이란 단어에서 풍기는 강제동원의 불법 이미지를 희석하려는 속 보이는 노림수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일본의 억지 주장들을 어제오늘 겪은 일은 아니지만, 늘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 같아서 답답하기 그지 없다. 가장 유명한 일본의 역대급 억지는 독도이다. 일본은 올해의 방위백서에도 '독도는 일본 땅'이라면서 14년째 억지주장을 반복해 오고 있다. 역사적으로 문서를 찾아보면 독도는 우리 땅이 확실하다. 512년 신라시대 삼국사기부터 1900년 대한제국 문서까지,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적혀 있다.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잠깐 점령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는 한국이 일본에게 주권 침탈을 당했던 시절이었다. 그후 2차 세계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면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조약이 일본이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우기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르면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의 모든 권리, 권언, 청구를 포기한다라고 쓰여져 있다. 여기에는 대표적인 섬 몇개만 예시적으로 적혀졌는데, 이 예를 든 섬 중에 독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생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약에 기재되지 않은 모든 섬이 전부 일본 땅이라는 말인가. 이에 대해 일본은 한반도의 가장 끝에 위치한 섬을 언급했기 때문에 동쪽으로는 울릉도까지가 한국땅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남쪽으로는 제주도가 끝이 아니라 마라도가 끝이다. 심지어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사실은 일본 고대문서에도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독도를 자기 땅으로 우겨서,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국제 재판소까지 끌고 가려한다.

     불현듯 걱정이 앞서는 이유는 일본의 억지가 야금야금 먹혀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학교 교실에 걸려져 있는 세계전도에는 우리의 동해가 사라지고, Sea of Japan 이라고 또렷하게 적혀져 있다. 우리가 국제법상 분쟁지역은 양쪽의 지명을 모두 기재하는 것이 맞다며 입으로만 떠들고 있는사이, 일본은 실질적인 로비를 통해 구글을 점령했다. 학교에 있는 지도뿐 아니라, 요즘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는 지구본에도 동해가 사라진지 오래다.  오랫동안 세계지도에는 대한민국의 동쪽 바다 위에는 동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다 10여년 전부터는 Sea of Japan이라고 적어놓고 그 아래 괄호를 넣어 (동해)라고 적어놓더니, 이제는 아예  Sea of Japan만 기재해 놓은 지도들이 더 많아졌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세계 지도에 독도가 동해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미국은 패전국인 일본에게 비상식적으로 관대한 정책을 시행했다. 패망국 일본을 부흥시켜 냉전체제에 대비하기 위해 조급하고 부실하게 전후 처리를 해버렸다. 독일의 전범들은 유명한 뉴른베르크 재판을 통해서 역사의 심판을 받았지만, 일본에서는 전범재판이 지극히 형식적으로 흘러서 일본 스스로 별다른 죄의식을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시도 때도 없이 주장하고 청천욱일기를 틈만 나면 꺼내드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렇게 과거사 문제가 불합리하고 불완전하게 정리됐음에도 불구하고, 한일이 1965년 조약 체결 이후에 양국관계를 50년 이상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안보와 경제로 서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고 한국이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지금, 이 체제는 더 이상 영양가가 없어졌다.

    이제라도 일본의 억지 주장을 한점이라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권리를 찾지 못하고, 영토까지 빼앗긴다면 그야말로 패전국이 되는 것이다. 지금 한국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듯하다. 일본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빈틈없이 우리의 영토로 전진하고 있다. 해외에 거주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일본과의 싸움은 국내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절대 안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독도와 동해를 위해, 그리고 이번 대법원 판결의 집행을 위해 국제적인 홍보에도 주력해야한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아직까지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다. 우리의 우유부단하고 뜨뜬미지근한 태도가 일본의 반성과 성찰 없는 퇴행적 태도를 길렀음을 인지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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