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상만이 산이 아닙니다

    44년전 제가 중학교 3학년때 고향인 제천을 떠나 서울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공부 좀 한다면 서울로 전학 가는 붐이 일어났을 때 저희 부모님도 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어린 저를 서울로 보내게 되었던 것이죠. 서울을 향해가는 기차안에서 삶은 계란과 김밥과 사이다를 사서는 하나씩 껍질을 벗겨 제게 건네 주시고 그것을 맛나게 먹는 저를 바라보며 서울에 도착하는 그 긴시간동안 아버님은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리 다정다감하지 않으셨던 부모를 떠나 이제 자유롭게 살수 있게 되었다는 야릇한 흥분으로 가득했던 저는 아버님의 그 침묵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십오 년 전 큰딸 아이를 대학 기숙사에 들여 보내기 위해 짐을 싣고 캠퍼스로 들어가는 동안 저도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딸을 남겨두고 등을 돌릴 때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그 뒤 작은 딸아이를 뉴욕대학으로 보내면서 공항으로 가는 차안에서도 그리고 딸을 보내고 돌아오는 시간에도 아내와 함께 한마디의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 오래전 저를 보낼 때 이해할수 없었던 아버님의 침묵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둥지를 떠나는 자식을 보며 과연 잘 날아 오를 수 있을까하는 걱정과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은데 그 풍파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아주길 바라는 간절한 소원함을 어떻게 자식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들이 침묵하는 가슴에 가득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품에 있던 긴 시간동안에 주지 못했던 사랑을 후회하면서 그리고 삶으로 보여주지 못한 부족한 부모의 미련함으로 가슴을 치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이 아이들이 장성하여 결혼을 할 때도 예식 전날부터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그때에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침묵은 결국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자식을 맡길 수밖에 없는 내려놓음으로 끝이 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침묵,부모님의 침묵,그리고 지금 부모된 우리가 침묵하는 이유를 알아갈 때 철이 들어가는 거겠죠. 침묵 안에 새겨진 수많은 감정과 사랑과 기다림과 고통을 품고 세상을 향해 가는 자녀들을 위해 손을 들고 축복할 수 있는 것은  부모됨을 통하여 누리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은총이라 여겨집니다.

    산정상만이 산이 아닙니다. 요즘 한창 인기있는 강사로 알려진 김창옥교수가 포프리쇼라는 토크쇼에서 남난희라는 한 여성 산악인을 소개하며 그분이 남긴 이야기들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김창옥교수가 전하는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강가푸르나를 정복한 국내 최초의 여성 산악인, 산악인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강인한 여인, 백두대간 단독 종주,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남편은 출가를 하고, 아들과 홀로 남게 된 남난희......더 이상 높은 산을 오르지 못하게 된 그녀는 지리산에서 된장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사춘기 아들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 힘들고, 그녀의 된장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지만 자신의 삶을 즐기며 살 기위해 적당한 돈 이외는 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동네 뒷산을 올라, 정상에서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솔밭 길을 걸으며 소나무를 부여안고 그녀는 말합니다. “너는 어쩜 이렇게 잘 생겼니?”귀를 대어 소나무의 소리를 듣고, 다시 조용히 걷고, 한참 후 다시 산을 내려옵니다. “산악인은 산을 오를 때 정상에 있는 봉을 오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산의 정상은 산이 아닙니다. 산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도 산입니다. 전에 제가 산을 오를 때는 오직 정상만을 생각했습니다. 산에 있는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산을 봅니다. 바람도, 구름도, 저 산 너머의 마음 머무는 그곳도. 예전에 보지 못하는 그것들을 보며 모든 것의 냄새와 소리에 마음을 엽니다.”

    한 여성산악인의 삶을 소개한 후 김창옥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남깁니다. 산에는 정상이 있습니다. 당신들의 생각의 끝에는 원하는 그 무언간의 정상이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를 꿈꾸고, 누군가는 나의 모습을 꿈꾸고......꿈은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닫힌 하나의 문을 열어라. 그리고 들어가라. 또 다시 닫힌 열 개의 문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나의 문을 열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거라 생각하지만 그 문 뒤에는 또 다른 문들이 존재합니다. 지금 여기도 당신의 산입니다. 지금 여기도 당신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이 자리, 당신의 삶에서 행복을 찾으세요. 언젠간 달라질 거야. 그 날이 오면 난 진정 행복할거야. 오직 그 날만을 생각하며 지금 이 시간을 하찮게 여기는 오류를 범하지 마세요. 당신이 오르려고 하는 그 산 정상이 언젠가는 찾아오겠지만, 지금도 역시 당신은 그 산 언저리, 중간쯤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꿈꾸는 산의 시작이 지금 여기입니다. 당신의 꿈은 이미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

    제가 쓴 글도 아니고 제 이야기도 아니지만 제 마음에 새겨둔 말씀이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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